소감문이라고 썼지만 짧은 단상들입니다. (조금 고쳐서 다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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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문 : 살아가겠다_고병권

과천녹색당 세상을 바라보는 몇 가지 시선공부모임 _ 깃털 | 2015.8.30

 

철학하는 왕을 철학하는 데모스로.

철학하는 데모스, 이성을 사용하는 대중이 민주주의의 유일한 희망일 거라고 자주 생각한다. (민주주의란 결국 철학하는 데모스가 어떻게 탄생하느냐의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람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가진 이가 곧 민주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아직 그렇다고 주장할 정도의 생각은 아니다. 사람을 깊이 신뢰하지 못하면서 민주주의자인 양 하는 이는 시대를 잘 타고난 권력 추구자에 불과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45.

 

폭력을 행사하기 전에도 시설은 잔인하다. 인간의 삶을 날 생명으로 떼어내어 권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시켰다는 점. 한 삶이 날 생명으로 분리된 채 관리된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시설의 장애인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을 개체로 발가벗기는 이 사회에 순응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조화로움을 체험하는 삶, (경제적, 정치적 힘을 가지는) 공동체, 세대를 잇는 삶을 허용하지 않고, 개체로서 권력 앞에 웅크리도록 강제된 것이 현대의 삶이다. 우리는 날 생명이며, 잔인하게 벌거벗겨진 무기력한 생명체다. 이 조건 위에서 지배가 작동한다. (개체의 생명과 권리를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태도에 대해 돌이켜 생각할 필요가 있다.) 71.

 

의지가 꺾일 때 바보가 생겨난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의지를 꺾어 놓는다79.

 

시설사회, 시설병을 앓는 사회, 생명권력

어떤 바보들은 인간의 문제가 심각한데 무슨 동물복지냐고 말한다. 모두 우리가 만든 지옥들이며 우리 사회의 거울이다. 장애인 시설, 정신질환 관련 시설(최근까지도), 바닷가와 배 위에 있다는 노예 노동 등등 사람으로 채워진 지옥들과, 동물로 채워진 축산 공장은 다 다를 바 없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지옥 위에 집을 짓고 산다는 바로 그 점에 있다. 80.

 

인권 담론은, 권리 단위를 고립된 생명으로서 재생산하는 측면이 있다.

인권은, 개인을 억압한다고 전제된 공동체와 폭력을 독점한 국가로부터 개인을 지켜내는 매우 소중하고 타협 불가능한 가치다. 더 큰 조화로부터 뿌리 뽑혀 무기력한 개체로 내던져진 삶의 존재 조건 자체에 대해서는 어떨까? 자본주의는 개인을 신분적으로 불평등한 과거의 생산관계에서 떼어내어 인권의 진보와 동시에 새로운 지배-피지배 관계 구축에 성공했다. 81.

 

정상적인 삶은 없다. 비정상의 삶을 연민하는 데서 멈추지 마라. 81-82.

 

탈출 구축 기성의 삶을 공격하고 변형시키는 투쟁

논리로는 늘 옳다 여기면서도 한 번도 실감나지 않는 이야기. 왜일까? 새로운 코뮌을 구축하는 것 자체로 심원하고 의미 있고 즐거운 프로젝트. 그래서 비정상 속에 하나의 정상을 만드는 데 그치고 다음으로 잘 나아가지 않는다는 느낌. (논리적/현실적) 단계론에는 늘 함정이 있다. 처음부터 정치여야 하지 않을까. 너무 깔끔한 논리는 더 생각할 의무를 적당한 데서 멈출 핑계가 되기도 한다. 82-82.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채 죽는다. (들뢰즈) 자신일 수도 있었을 많은 것들을 실현시키지 않은 채 죽어간다.

거꾸로다. 기계 부품이나 노예일 때, 타인이 나를 규정할 때 내가 누구인지 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테론 그레이조이는 램지 볼튼의 장난감이 되고서 내가 누구인지 말하게 되었다.) ‘나는 누구입니까?’ ‘너는 장애인이다.’ 사실은 누구인지가 아니라 무엇인지겠지만. 저자의 말대로 삶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이라면 그 삶은 멈추지 않으므로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고, 심지어 누구인지 알려하지도 않는다. 나는 삶을 누릴 뿐이며, 굳이 말하자면 내가 누구인지는 내 삶이라는 책을 통해 사후적으로 드러날 수도 있으나, 역시 나의/주체의 삶은 말과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은, 삶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한다는 말 자체가, 조작된 욕망일 가능성이 크다. 개체에게 무한이 어디 있냐?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겠다는 것과 비슷하다. 96.

 

현장이란 시간공간이 결합되어 있는 흥미로운 단어이다. 무엇보다 사건시공간이다.

현장에 있다는 말은 어떨 때 쓸 수 있을까? 현장이라는 말은 자부심과 두근거림을 동반한다. 거기 긴장이 산다. 아마도 현장은 갈림길이며, 의지가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시공간이기 때문 아닐까. 현실을, 삶을, 이편으로도 저편으로도 이끌 수 있는 그 갈림길에 발 딛고 있다는 것이 현장의 삶 아닐까. 대체로 현실은 무기력하고 정해진 듯하지만, 어떤 시공간의 어떤 삶은 변화의 가능성에 발 딛고 있다는 것. (거꾸로 말해 현장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은, 정해진 대로 산다는 것, 혹은 내 의지로 선택할 변화가 없는 삶을 산다는 것.) 104.

 

죽음의 설교자

내 삶의 가치를 절하하는 사람. 내 의지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사람. 내게 기대하는 게 없는 사람. 나를 장애인, 혹은 정해진 어떤 것이라 부르며 규정짓는 사람. 수많은 주인들, 스톡홀름 증후군은 대체 얼마나 보편적인 질병인가? 117.

 

우리 안에 맹수가 살고 있다.” 학생들이 자기 안에 산다고 확신하는 그 맹수는 아마 그동안 입은 상처의 표시겠지만 앞으로 그들의 엄청난 힘이 될 수도 있겠다.

내 안에도 맹수의 의지가 있다는 걸 발견하고 의지의 억압에 대한 순응에서 탈출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공감하고 또 공감한다. 또 한 편, 이제 이 사회는 상처 받은 맹수를 풀어놓으라고 이 멋진 맹수 전용 상품을 사라고 부추겨지기도 한다. 사회가 맹수를 길들이기 전에 내가 맹수의 주인이 되는 것이 그래서 문제다. 117.

 

소위 대안이라는 것 자체가 좌우 엘리트들에 의해 구조화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현실적 대안이라는 말의 득세와 함께 그들의 권력이 공고해져 가고 있음을 느낀다. ‘현실적 대안이 없음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 ... , 혹은 하나의 대안을 다른 대안으로 계속 바꿔치기 하며 대안 없음에 대한 자각을 늦추는 것.

적어도, 너희에게는 대안이 없다고, 분명히 말해야. 그러나 어차피 대안은 없구나, 라는 안도와 안주도 안 된다. 자칫, 생각하기를 멈추게 된다. 131.

 

난 석사학위를 땄고, 그 대신 5만 불의 학자금 대출을 떠안았다. 보험도 안 되는 2개의 파트타임을 뛰고 있고, 의료보험도 없으며, 집도 없고, 아이 둘을 키워야 한다. 젠장, 완전히 엿같다!” “해고는 살인이다!” ‘이 체제의 존속은 살인이다.’ ‘삶의 불가능성에 대한 고발.

우리는 매일 듣는다. 삶이 체제에 하는 말, 삶이 불가능하므로 체제도 불가능하다. 136, 146-147.

 

민주주의의 직접성과 직접민주주의

민회를 통해 민주주의의 직접성을 체험(해방)하면서, 그런 해방에 턱없이 부족한 직접민주주의와 같은 제도적 변화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도전해야 한다. 해방의 체험에 안주하지도, 그 순간에 중독되거나 집착하지도 마라. 비루한 현실에서도 그 현실의 구차한 개선에서도 빠져나가지 마라. 137-138.

 

목적과 수단은 분리되지 않는다. 당신이 원하는 삶의 형태가 당신의 투쟁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운동은, 투쟁은, 예시적이다.

나도 그렇게 믿고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그 예시적 삶이 충분히 유혹적이어서, 내 삶과 우리의 투쟁을 이어줄 거란 믿음이 사실 잘 들지 않는다. 훌륭하게 살면 훌륭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위로가 되나? 삶과 세상이 이어지는 지점에 대해, 더 집요하게 생각하기 힘들어서 택하는, 논리의 위안 같은 건 아닐까? 훌륭한 삶은, 세상의 변화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고, 그냥 그 자체로 좋고 그 이상 생각하는 건 무리라고, 이렇게 솔직하게 (도가적으로?) 말하는 게 옳을까? 139.

 

이제는 운동도 무한정의 시간에 직면하고 있다. 단기냐 장기냐가 아니라, 시간을 한정하지 않는 어떤 운동의 형식, 시간의 한정성을 넘어선 투쟁의 형식 우리는 시간적 무한정성을 다루는 운동의 형식을 발명해야 한다.

최소한의 올바름. 그냥 절망하지는 말라는 거지. 144, 147.

 

지킴이들의 삶의 방식. 현장의 삶. 투쟁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정당한 방식으로 선택할 만하다. 지킴이와 같은 삶이, 특이한 몇몇 사람의 삶이 아니라, 선택 가능한 삶의 한 형태가 될 순 없을까? 가능할 것도 같은데. 149.

 

당시의 지배적 감성, 노동자는 낮에 일하고 밤에는 잠을 자며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통념을 거부하고, 밤에 자지 않고 읽고, 쓰고, 토론하는 노동자들이 생겨났을 때가 해방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넘어서는 그 깨침의 과정을 나는 공부라고 말하고 싶다.

어떻게든 시간을 짜내어 공부를 통해 새로운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노예인 줄 모르는 것, 오늘 노동의 스트레스를 푸는 오락이나 내일 노동을 위한 휴식이 아닌, 쓸 데 없는 일들에 매달리는 사람을 경멸하는 것, 이야말로 정말 가련한 일. p. 188.

 

해고는 살인

해고가 살인이라면 고용은 뭐냐? A에서 벗어나는 게 곧 죽음이라면 A는 살인의 공범이다. 어째서 임금노동자 되기가 인간 삶의 보편적 조건이 되었는가? 비극은 해고에 있는 게 아니라 임금노동자로 고용되어야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203.

 

청년유니온. 존재 자체가 연대

마음으로 연대하고 가끔씩 가서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위치(position)를 연대의 일부로 이동해야 한다. 연민이 아닌(연민도 중요하다.) 연대라면. 218-219.

 

이계삼

민주주의의 직접성을 구성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노동자, 농민,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쓰기 시작했다가, 다시 헌신하는 소수의 삶의 이야기로 후퇴했다. 이 책은 여전히 현장에 있지 않다. 이름 불리는 사람의 삶을 동경하지 마라. 221-233

 

그동안 현장을 장악했던 건 기독교 담론이에요. 헌신, 봉사, 이런 담론.

해방의 기독교와, 헌신과 봉사의 기독교. 원래 기독교는 무엇이었냐, 따위의 질문은 의미 없다. 해방의 종교/사상이 필요할 뿐. 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