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을 읽고 - 박정원

함께 읽기/기타 2015. 11. 25. 15:15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세바시 / 아즈마 히로키『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15.11.25 / 박정원

 

오타쿠와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오타쿠’에 관한 책인데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책제목을 보고 얼른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1장, 2장에서 오타쿠, 포스트모던, 이야기 소비, 커다란 비이야기, 모에 요소, 데이터베이스 소비, 시뮬라크르, 스노비즘, 해리적 인간의 개념까지 읽고, 마침내 9절 ‘동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책의 의도를 이해하게 되었다.

 

‘동물의 욕구는 타자 없이 충족되지만 인간의 욕망은 본질적으로 타자를 필요로 한다.’(p150) ‘동물이 된다’는 것은 간(間)주체적인 구조가 사라지고 각자가 각자의 결핍-만족의 회로를 닫아버리는 상태의 도래를 의미한다. 현재의 소비사회에서는 소비자의 요구가 가능한 한 타자의 개입 없이 순식간에 기계적으로 충족되도록 날마다 개량이 거듭되고 있다. 우리들의 사회는 최근 수십 년간 확실히 동물화의 길을 걸어왔다. 오타쿠들의 소비행동도 또한 ‘동물적’이라는 형용에 그대로 부합한다. 현재의 오타쿠들은 감정적인 만족을 더욱 손쉽게 달성해주는 모에 요소의 방정식을 찾아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을 소비하며 도태하고 있다. 저자는 1995년 이후의 시대를 ‘동물의 시대’라고 명명하고 포스트모던화 전체 속에서 생겨난 것이며 결코 국내적인 현상은 아니라고 한다. 예전에는 공감의 힘이 사회를 만드는 기본적인 요소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감정적인 마음의 움직임은 오히려 비사회적으로, 고독하게 동물적으로 처리되는 것으로 크게 변하고 있다. 포스트모던의 데이터베이스형 세계에서는 더 이상 커다란 공감 따위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의 인간은 ‘의미’에 대한 갈망을 사교성을 통해 충족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동물적인 욕구로 환원함으로써 고독하게 채우고 있다. 거기에서는 작은 이야기와 커다란 비이야기 사이에 어떠한 연계도 없고, 세계 전체는 단지 즉물적으로 누구의 삶에도 의미를 주지 않는 채 표류하고 있다.

 

여기에서 필자가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오타쿠계 문화의 변천과 그 바깥쪽의 사회적 변화와의 관련성을 이끌어내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오타쿠계 문화 같은 기묘한 서브컬쳐를 끌어안게 된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소감문

함께 읽기/기타 2015. 11. 25. 12:54 Posted by 서형원


151125동물화하는포스트모던_소감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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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소감문_아즈마 히로키_선정우

과천녹색당 세상을 바라보는 몇 가지 시선공부모임 _ 깃털 | 2015.11.25

 

 

너는 네가 네가 아님을 깨쳐야 네가 되기 시작할 것이며, 네가 네가 되기 위해선 타자 및 타자에 대한 욕망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들을 동료, 도반, 혹은 벗이라 하자.

 

동물화한 인간 : 전후 미국에서 등장한 소비자 대중, 오타쿠, 그리고 우리.

  • 인간의 동물화 : 사실은 아무 설명이 필요 없이, 직관적으로 옳다.

  • 주어진 환경을 부정하거나 환경에 대해 투쟁하지 않는 인간.

    욕망 없는 욕구 충족. 배고프면 먹고, 영화를 보면 울고/웃고, 답답하면 여행을 떠나고. 이 모든 행위가 상품과 서비스의 소비로 충족가능하다. 상품과 서비스의 선택 가능성은 한없이 광대한, 그래서 나는 자유롭다고 말하게 할, 데이터베이스로 주어진다. 여기에는 뭐가 없다? 타자/타인이 없다. 타자가 없는 것이 편하다. 그래서 타자가 필요 없는 인간이 곧 오타쿠다.

  • 중심성의 왜곡된, 상업적으로 주입된 강조. 타자를 지우면 나는 상품들을 대면한다.

  • 타자가 필요 없다. - 간주체적 욕망이 없다. - 행위(아렌트)가 없다. - 정치가 없다. - 정치경제 지배 엘리트의 먹이가 된다.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동물화된 인간들의 욕구-충족 회로 위에 미국식 자본주의와 엘리트 정치가 번성한다.

  • 타자/간주체성을 잃으면, 토목공사는 거미줄 치기, 콘서트는 매미 울음과 다르지 않다.

  • 웰메이드, 우리를 안심하게 한다. 데이터베이스들이 절묘하게/웰 집합되었고, 내가 기성품 같은 울음과 웃음을 잘 터뜨리도록 해준다. 자기 것이 없는 아이히만의 언어와 같다.

  • 저항 음악? 데이터베이스에서 골라낸 저항의 클리셰들. 저항 음악에 감동? 기성품 같은 감정의 데이터베이스에서 골라낸 감정의 클리셰들. 저항적 음악이 아닌, 진짜 저항 음악이 있겠지.

  • 동물화된 인간은, 결핍-만족의 반복이라는 돼지우리에 갇힌 인간의 모습을 의미한다. 무수한 선택지들(데이터베이스)과 신성불가침한 선택권이 있다. 이 얼마나 자유롭고 존귀한 존재인지.

  • 그러니까 우리는, 즉물적인 약물중독자다. 취미도 취향도 아니고, 약물중독이다. 주입된 욕망이며, 욕망의 흉내내기다. 이 욕망이 가짜라는 건,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멈출 수 있다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타자와의 게임, 밀고 당기기, 간주체적 행위가 없기에 불편하면 멈추고, 내가 멈추면 실제로 멈춰지는 것이다. 성가신 인간관계가 없는 행복하고 자유로운 세상이다.

  • 거세된/불임의 욕망이라는 의미에서 가짜 욕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진짜와 가짜의 차이는, 손쉬운 성기적 욕구 충족과, 인간의 성적 관계를 획득하려는 노력 사이의 차이와 같다.

우리의 언어를 통한 나의 회복

  • 내가 내가 아닌 것들로 조립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물론 여러 부품/데이터 중에 내가 선택했을 순 있으나그 어떤 것도 내가 만든 건 없고그런 나는 아무 이야기도 지어내지 못한다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만들어지는 내가 아니면 가짜다타자에 대한 욕망우정에 대한 갈구가 없으면나는 가짜다연결 짓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척하는 해리적 인간들그러나 연결/이야기를 대체한 동물적인 욕구의 충족으로 채울 수 없는 고독은결국 터진다인생이 망한다는 말이다. 

  • 진짜 나의 언어를 찾아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언어를 만들자그것으로 우리 삶과 우리 미래를 직조하자.

사회를 구성하며, 나를 초월하는 신화를 이야기로 직조했던 인간들. 장구한 역사, 드높은 가치, 지고한 담론, 거대한 판타지로 이어졌다. 망망한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욕망은 이들 과거의 욕망들과는 다른 것일까? 초월에 대한 갈망에 어떤 보편성은 없을까? 이때 자유란 무엇일까?

심층(심연)에서 거대한 이야기가 사라진 까닭은 무엇일까.


126.

무엇보다도 계몽이나 이성 같은 커다란 이야기가 처음으로 조락하기 시작한 것이 1차대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역으로 그 조락이 완전히 표면화한 것은 냉전이 붕괴하고 공산주의라는 최후의 커다란 이야기의 망령조차 없어진 1989년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914~1989 : 커다란 이야기의 조락, 근대포스트모던시대의 긴 이행기. 냉소주의와 스노비즘. 

이것이 일본에서는

129

1945~1970: 이상(理想)의 시대, 커다란 이야기가 그대로 기능

1970~1995: 허구의 시대, 커다란 이야기가 가짜로서 기능, 이야기 소비

1995~현재 : 데이터베이스 소비, 심층 자체의 소멸, 표층의 기반은 심층이 아닌 데이터베이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심층(심연)에서 거대한 이야기가 사라진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저자의 말에다 뭘 좀 보태보자면, 

저자는 근대적 이성주의(인간의 이성은 전능하다)1차대전을 통해 조락을 시작했다고 본다. 인류가 이성의 야만성을 목도한 것이다.

1800년대 초반 이성에 대한 믿음은 베토벤의 운명교향곡(1808)에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중세의 권위가 시민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혁명의 열기로 표출되던 시대, 꽝꽝꽝 꽝~! 인간이 개척한 운명이 문을 두드린다. 열어야만 한다. 고통받는 민중들의 고뇌와 삶을 목도했으니 이제 박해와 압제의 시대는 가고 사랑과 해방의 시대가 올 것이다.(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차이코프스키, 엘가 위풍당당행진곡)

하지만 문을 연 결과는 1차 대전의 야만이다.(엘가 첼로협주곡E단조) 쐐기를 박듯 2차 대전이 일어나고 최첨단 기술의 집적이 역사상 최대의 학살을 일으킨다. 신념이 해체되고 인류는 해체되어 개인(소비자)으로 해체된다. 조화(에 대한 믿음)는 사라지고 카오스적인 불협화음이 진실이다.(쇤베르크 등) 마지막 신념으로 소련에 구현된 공산주의가 남지만 실체는 그 허구인 스탈린주의일 뿐이다.

1989년 스탈린주의(옴진리교)가 무너짐과 함께 거대한 이야기가 사라졌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거대한 이야기=유일신에 대한 믿음, 조화와 통합, 이성적인 세계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이 데이터베이스(개인의 자아와 분리된 파편의 축적물)이다. 이제 서사는 사라지고 파편 조합의 소비만이 남았다.......

는 것인데, 그렇다면 거대한 이야기는 어디에서 사라진 것인가? 심층이란 누구의 심층인가? 저자는 아마도 대중(또는 시대정신)을 말하는 듯한데, 정말 시대정신에서 거대서사가 사라졌을까? 저자의 증거는 일본의 미국의 동물적 소비자이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어쩌면 사회 지배층에게서만 사라진 것은 아닐까?

여기서 조셉 캠벨의 말이 생각났다.

 

(예시 : 메소포타미아 지역 아가데의 사르곤왕(기원전 2350년 경)과 바빌론의 함무라비왕(기원전 1700년 경)의 신화)

(농경사회의 우주론적 신화로부터 왕들의 신화, 도시국가의 건국신화가 파생되었다. 이것은) “전설 자체가 우주론적 지평으로부터 개인적인 관련으로 하강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열등한 명상을 낳는다. 즉 신의 이미지 속에서 에고가 소멸(신화적 동일시)하는 대신 정확히 그 반대가 된다. 신의 자세 속에서 에고의 고양(신화적인 과대화)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을 조작하는 기술에 숙달된 자들이 육체를 갖춘 신의 역할을 해내고 그러면서 용케도 양날 도끼로부터 목을 구하게 된 이후로, 이것은 통치자들의 만성적인 병이 되었다.....그러한 속임수의 결과는 왕권을 사제단과 별들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국가를 종교적(성직자의) 제도에서 정치적(왕족의) 제도로 바꾸며, 왕들의 주된 관심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세상의 정복이 될 수 있는 시대를 연 것이었다.”-서양신화 93, 조셉 캠벨 저, 정영목 역.


두 이야기를 연결해보자. 근대적 이성은 도시국가를 건설한 왕들의 의지(에고)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에고가 대중에게 전염되어 집단적 과대망상으로 드러난 것이 근대의 이성주의 아닐까. 왕들이 세상을 정복하려 했던 것처럼 인간이 이성으로써 세계를 건설하려 했던 것 아닐까. 이런 맥락의 세계 건설 스토리가 위에서 말하는 거대한 이야기의 정체 아닐까. 그렇게 보면, 4500년에 걸친 실험이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사건을 끝으로 쫑났다는 것이다. 그 긴 시간동안 인류는 우주론적 지평에 대한 것을 모두 잊어버렸다. 그러니, 세계는 그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일 뿐이라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선언의 근거는? 오타쿠와 동물화한 소비자로 대별되는 현대의 상업주의.

 

사족.

대중이 잃어버리고 있던 우주론적 지평을 찾아주려 한 대표적인 인물이 석가모니와 예수였던 것 같다. 하지만 과거에나 지금에나, 대중과 그 지배층들 사이에서는 그 가르침에 대한 오해가 지배적이었나 보다.

“...부처는 이윽고 이렛 동안 네번째 나무 아래서 해탈의 기쁨을 만끽했다. 이 때 그는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남들에게 전할 수 있을지 가늠해 보다가 당분간은 홀로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 브라마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에게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부처는 그의 말에 승복, 자신이 깨친 도리를 전파하기로 하고는, 자신이 속인들과 함께 살던 도시로 돌아가 정도(正道)의 법이라는 귀한 은혜를 두루 전파했다.” - 세계의 영웅신화 36~37쪽, 조셉 캠벨 저, 이윤기 역.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함께 읽기 2015. 11. 1. 18:35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그동안 우리가 청년을 보는 시각이 얼마나 보수적인 틀에 갖혀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요미우리 신문등에서 요즘 젊은이들의 내향적임을 비판하는 사설들은 우리나라 언론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향적이고, 국가에 관심이 없는 소위 말하는 우리 세대의 경향은 개선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있었다. 그래 우리도 으쌰으쌰 일어나야지. 도대체 무얼 위해, 어떻게,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며 우리가 그러한 생각을 갖게하는 것도 일종의 정치였음을 알았다. 아니 실은 더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으나 그 생각이 내 앞에 문서로 다가왔다. 그것은 엄청난 차이이다. 아마도 이 책이 일본에서 엄청난 열풍을 일으킨 것은 나와 같이 느낀 청년들의 리액션일 것이다.

나느 오래전부터 가족에 대한 신화는 깨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회가 더는 '가족은 화목하다'라는 것을 더 이상 가족의 공식으로 여기지 않기를 바랐다. 내 주변의 많은 가족들은 그렇게 이상적으로 화목하지 않기 떄문이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에 충성해야한다' '국가를 사랑해야한다' 따위의 국가에 대하여 국민이 가져야 하는 태도, '현대의 젊은이는 유학도 가고, 나라 밖으로도 나가고, 투표는 해야하며, 국가가 국민을 필요로 해야할 때 누구보다 빠르고 충성적으로 응해야 한다' 따위의 국가의 신화나 젊은이의 공식도 이제는 깨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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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_후루이치 노리토시_이연숙

과천녹색당 세상을 바라보는 몇 가지 시선공부모임 _ 깃털 | 2015.11.1

 

 

이 책에 의하면, 젊은이의 필요 = 빈곤 해결 + 승인 욕구 해소

   - 빈곤 해결 : 우리 사회에서 프리타를 통해 친구와 놀고 콘서트 가고 여행을 하는 등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생활이 가능한가?

   - 승인 욕구 : 이 책에서 말하는 일본 젊은이의 승인 욕구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 자체이고 생계는 따로 해결 가능.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어떠 일이든 인정을 받으면 바로 금전적 보상으로 전환해야 하는 체계 아닌가? 위나 아래나 모두, 결국 돈으로 보상해달라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왜 그 일을 왜 하냐며. 별풍선.

 

(일본 젊은이들은) “굳이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모두 해결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를 통해 해결. 젊은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저자가 바라본 일본처럼 다양한 문제들인가, 혹은 매우 기초적이거나 생존적인 문제인 건 아닌가? 해결하지 않고도 일본 젊은이들처럼 각자 해법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문제들인가?

 

우리 사회도 행복한 계급 사회로 갈 수 있을까? 의사 결정에 분주한 일등 시민과, 태평하게 하루하루를 소일하는 이등 시민으로 구성된. 생각할 점은, 이른 바 <물적 토대> 문제, 행복한 이등 시민을 만드는 문제. 행복한 이등 시민 = 새로운 식민지.

 

왜 청년일까? 청년을 위로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심지어 청년의 행복을 위해서도 아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유를 잃고 사육되고 착취되며 그날그날을 자기 삶을 소모하는, 그런 사회로 가는 징후가 지금 청년의 삶과 삶의 환경에서 읽히기 때문이며, 청년이 아니라, 내가, 혹은 우리가, 단호히 그런 사회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생각대로 말하자면, “무언가를 하고싶다.” 혹은 이대로는 안 되는데.”라고 말하며, 자신의 지루한 일상을 바꿔줄 강력한 비일상을 희망하는, ‘불끈하는 젊은이들, 분명히 존재하지만 무기력하다. 무기력하기에 월드컵이 끝나면, 봉사 활동을 마치면, 결국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 존재하지만 스스로 활성화되지 못하는 에너지다. 그래서 스스로 정치적으로 무력하고, 그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여기에 간단명료한 출구를 제공하는 기획가planner 내지는 촉진가facilitator가 필요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의지를 가진 촉매 그룹의 필요성을 함의하는 것일 수 있다. 공감을 가장한 푸념어린 동어반복 - “힘들어!” “얼마나 힘들겠어.” - 은 물론이고, 잠시 불끈하고 다시 흩어지게 되는, 월드컵이나 일시적 봉사 활동 같은, 장기 전망에 대해서는 될 대로 되라는 재밌는 활동으로는 큰 절망과 작은 행복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결심만 굳히게 할 뿐이다. 저자는 뜻 있는 집단이 마음 둘 곳으로 여겨지면 당초의 목적 따윈 잊게 된다고 말함으로써, 이런저런 활동들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식의 낙관론에 쐐기를 박는다. (마음 둘 곳이 된다는 게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 활동에 단독적인 의미부여를 하는 경우는 대체로 문제가 있다. 상대화, 맥락화하지 않는 고립된 활동에 머무를 때 말이다.) 에너지의 이와 같은 조직화가 곧 정치요, 이를 담는 그릇이 정치세력 아닐까.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소감문 - 이한진

함께 읽기/기타 2015. 10. 31. 22:1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읽고 (이한진)

일본은 막연하게 우리와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해서 청년들 이야기도 비슷할 것이라 예상은 하고 봤지만 생각보다 더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몇가지 새롭게 생각하게 된 것 중 하나는 일본도 50, 60대 어른들을 하나의 공감대로 엮을 수 있는 것이 경제 부흥시대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 그것은 우리나라 경제가 부흥했던 시기에 일본도 그러했다는 것. 뭐랄까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은 한마디로 박정희 대통령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처럼 당연하게 인식되어지고 있는데, 세계적으로 전쟁 이후에 전반적으로 발전하고 있던 상황이 아니었나 싶다. 이렇게 빨리 되지는 않았겠지만, 그 속도만큼 놓친 것들은 고스란히 남아 있을테니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 가져야하는 태도에서 지금의 젊은 세대까지 찬양하고 따르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책을 통해서 청년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 부분도 많지만 그 부흥을 만들어갔던 어른세대들의 상황, 마음, 생각들을 많이 상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세대론의 관점으로만 보면 놓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점. 예를 들어 청년들의 사망 원인 중에 자살률이 1위라는 것을 표면에 내걸게 되는데 실제로 노인들이 몇 배는 더 자살률이 높다는 사실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보면 청년세대를 살피면서도 전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고 이 시대에 청년들을 통한 어떠한 메시지를 뽑아낼 때 혹은 뭔가 이 시대를 탐구해볼 때 감정적인 부분만큼 객관적인 부분도 놓치지 않고 다각도로 바라보면서 좀 더 근원적인 물음들을 해나가면서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하게 확인하고 공감한 점은 50대 이상 어른 층은 의견들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전체적으로 공감할만한 요소들이 상대적으로 있지만 요즘 청년들은 크게 '젊은이'라는 말로 통칭하기 힘든 만큼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포괄적으로 공감하고 나눌만한 시대적 국면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청년세대에 많은 문제가 있지만 핵심적인 어떤 것이 보인다기보단 산발적인 느낌들이 많다.

가장 생각에 남는 말은 마음 둘 곳이 필요하다는 것’. 어디 젊은이들뿐이겠냐만, 그냥 당연한 본능이겠지만 어딘가 마음이 짠하다. 크건 작건 건강한 모습으로 마음 둘 만한 곳이 늘어났으면 좋겠고(그 틈에 집단적인 애국심이나 내셔널리즘 같은거 말고), 스터디 모임하면서 배움의 효과인지 여러모로 공론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자주 들었다. 한편으론 여전히 여러가지 위기감이 많지만, 한편으로 개인적으로 막연하게만 느겼던 위기감에서 조금은 덜어진 느낌이고 오히려 지금의 젊은이들이 더 잘할 수 있고 이전 세대들보다 보다 좀 더 발전할 수 있는 점들이 있어 보인다고나 할까. 갈 길은 멀어보이고 달라진건 없지만 좀 더 희망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세상을 바라보는 몇 가지 시선 6차 모임

함께 읽기 2015. 10. 29. 00:1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권정우, 하승우 지음, 아렌트의 정치

-세바시 6차 모임, 서형원, 홍지숙, 신은희, 박병선, 이한진, 김지원, 장예정-

 

발췌된 부분은 어려운데 설명된 부분은 허무하다는 느낌이 들만큼 쉽게 설명.

정치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적립된 것과 같은 느낌.

 

추천사&서문

-발제문 생략-

첫째와 둘째의 가장 기본적인이라는 군더더기 있는듯한 표현.

 

11. 수용소와 무슬림

-발제문 생략

병선: 전체주의를 시스템이 아닌 운동으로 정의했다는 점에서 놀랐다. 헌법을 군중심리로 대체하였다라고 생각했다. 국민과 비국민으로 나누는 그러한 모습으로. . 한일월드컵 당시, 축구에 반응하지 않고 지나는 사람에게 ‘Are you Japanese?"라고 묻는 그러한 모습. 2장의 대중과 안전에서 더 이야기하는 걸로.

 

형원: 인간에 대한 완전한 지배는 가능할까? 하는 대목에서. 첫 번째 책에서 노동을 상품으로 만들 수 있느냐?와 같은 맥락의 질문인 것 같다. 대한민국 전체가 인간에 대한 완전한 지배는 가능할까? 에 대한 거대한 실험실이 된 것 같다.

 

2. 대중과 안전

대중에게 먹고 사는 것은 진짜 중요할까?

대중은 누구일까?- 한무리, 덩어리라는 뜻으로 해석. 대중에 섞이지 못할 때의 불안감.

p.73.

아렌트는 계급사회/ 국민국가의 붕괴로 대중이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대중은 왜 통제되어야 하나?

: 리바이어던의 개념으로 인위적 국가를 설명. 리바이어던의 목적은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비전 제시는 아니었다.

: 논의의 장이되는 탁자가 필요하다. 공적인 것은 공동의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세계성을 갖는다고 말하고 세계성은 인간이 탁자를 갖는 것을 말한다.

p.83. “타인을 염두해 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 너무나도 소중하다.”

<은희-그러나 자신의 감정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어떻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지? 하는 의문, 지나친 감정에 대한 경계정도로 이해하였다.>

노동과 행위에 대하여.

작업의 중요성-인간의 직접적인 수작업이 공유나 공동체를 만드는 행위로까지 보고 있는 것. (후에 다시 이 대목 논의)

왜 정치가 중요한가? (다소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껴짐)

p.93. 아렌트는 공적 영역이란 타인의 현존을 기반으로 자신의 차이성을 말과 행위로 드러내는 공간.

 

병선: 노동, 작업, 행위에 대한 정의와 탁자의 이야기, 용서와 약속에 대한 설명의 탁월함에 놀람. (형원 too) 노동은 생존의 영역이다,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형원-생물로서 필요한) 작업은 나만의 행위인 것이며 행위는 타자가 존재하는 공동의 일이다. (지숙-미술작업에서의 작업의 의미와 전혀 달라서 놀랐다.) 작업의 특징을 다른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 오직 나만의 행위인 것이다. 아렌트에게 있어서 정치의 작업이란 건축 등에서의 작업과는 전혀 다른 정치에서의 작업이 있는 것이다. p.91. 혼란을 질서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 인간이며 이것이 작업의 욕구이다.

 

지숙: 행위라는 말이 잘 이해가 안됬는데 나의 발제부분에서 타인의 존재가 행위에 들어있기 때문에 말과 행위는 정치적인 것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소통

 

형원: 레비나스 등의 주장은 타자는 절대적인 타자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해할 수도 없고, 지배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극복 불가능한 절대성을 지니는 대상이 타인이다. 이로 인해 파생되는 안전에 대한 불안감. (타자는 절대적으로 믿을 수 없기에) 용서와 약속. 레비나스는 타자란 성경의 과부나 고아와 같이 이해와 같은 것이 필요 없게 절대적으로 도와야 하는 그런 대상.

 

한진: ‘만남’(더 뒤쪽 단원에서) 노동, 행위와 같은 차가운 개념보다 만남이라는 단어가 더 잘 와 닿았다. 피부로 와 닿는 직접적인 만남이 아니라 어딘가 존재하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에의 주입. 직접 만나본다면,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인권이라는 것이 와 닿게 되듯이. (병선-사랑이 아니라 존중이다.)

 

형원: common sense-한 공동체가 공유하는 어떠한 공감. 말과 행동으로 공유되는 어떠한 것. 그러나 감정은 아니다. 다원성이 갖는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대화의 장에 나갔을 때의 것,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자유로운 인간.

 

병선: 가정에 대한 언짢은 표현. (형원-오늘 날의 가정이랑 다른 가정일 것)

 

은희: 세계성. (p.80-81) 세계를 갖는 것. 함께 이야기하는 탁자가 필요하다. 작업이란 세계를 만드는 활동이다. 작업이란 혼자만의 행위로 한 사이클. p.91를 토대로 작업을 노동과 달리 의미있는 행동이라고 표현했다고 생각. (형원-작업이 세계를 만드는 활동이다? 무슨 의미일까?)

 

형원: 노동에 대한 민감한 논쟁.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노동이란 신성한 것이라는 절대적 믿음.

 

지숙: 내가 말을 했는데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 그건 무엇이지

 

3. 공론장과 자유

-발제문 생략-

한진, 형원: 성경의 말과 같은 말인것 같다. 안전이 보장된 그곳을 떠나서 나아가라.

 

병선: 가정을 엄격한 불평등의 세계이며 노동과 생존의 세계라고 표현(고대 그리스의 사회)

경제학이 굉장히 중요한 학문으로 여겨지는 것이 슬픈 현실이다. 폴리스에서 하던 좋고, 탁월한 것은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를 경제학이 대체.

 

형원: 가정은 지금의 가정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 당시 가정은 생산단위의 하나라고 생각해야 한다. 지금의 가정은 그마저도 못하는 듯.

 

병선: 그것이 공론장 형성을 어렵게 하는 것은 사실.

 

형원: 고대 폴리스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이 이야기는 과거의 폴리스로 회기하자거나 이상화하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하고싶은 것은 앞으로의 이야기.

 

병선: 고대적 자유는 타인에 대한 폭력을 통해 가능하다. 지금도 특혜를 받은 시민들은 자유롭다. 가령 정치인처럼 노동이 필요 없는 이들.

 

형원: 안전. 9.11이후 안전에 대한 노이로제. 안전을 위협하는 타자는 절멸시켜야 한다. 그 예로 놀이터는 무조건 안전해야하기에 다치지 않는 모든 것으로 바꾸고, 학교는 절대적으로 안전해야하기 때문에 경찰이 학교에 들어가야 하고, 외국인은 위험하기 때문에 규제하고 배척해야 하고... 정치에서의 내 아이의 안전. CCTV 설치의 문제.

 

병선: 어떤 젊은 부부. ‘어떻게 CCTV를 설치를 안해 그 어린이집에?’ 군중심리와 공공감각의 차이. 불신, 나에 대한 불신과 타자에 대한 불신. 2부에서 인간은 자기 내면의 객관적인 적, 자신의 불확실함을 타자에 투영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의 가속을 어떻게 돌아가야 할까.

 

은희: 이러한 행태를 촉진하는 것. 공개되지 않는 정보, cctv사례에서 언론은 마치 어린이집 교사회와 같은 이익집단의 목소리만 반대하듯이.

 

병선: 언론도 소통, 대화가 없는.

 

형원: 이러한 체제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대안을 만들어야 하는. 공동육아처럼.

 

병선: 그렇게 벗어나서 자리 잡은 것들에 대한 압박.

 

21. 전체주의와 종북

-발제문 생략-

형원: 지금 우리 사회가 독재적이고 엉망진창이기는 한데 그것을 아렌트의 전체주의와 연결하는 것은 무엇이 의미가 있을까? 그것의 실익은? 충분한 설명이 되지도 않은 것 같다.

 

한진: 운동장에 줄서서하는 조례같은 모습. 이탈하면 안 되는 것. 국가는 그런 것을 원하나?

 

 

22. 정치와 권력

-발제문 생략-

병선: p.210 그런 점에서 정치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범죄이고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위협.

 

형원: 미국혁명을 왜 높게 평가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한진: 정치적 틀은 이어져야 한다.

 

병선: p.212. 권력을 폭력으로, 폭력을 권력으로

 

형원: 권력은 사실 영어로 그냥 power 혹은 political power로 해석. 그냥 정치력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 권력이라는 단어의 부정성. 정치를 둘러싼 상식과 용어에 대한 냉정한 성찰이 필요. 시민불복종은 법의 위반이 아니라 새로운 법을 위한 행위일 수 있다.

 

병선: 밀양에 관하여 녹색당 이 판결은 아니다;

 

형원: 정치가 사라지는 예시 중, 환경문제에 대하여 미국은 법학자와 경제학자가 평가, 법원의 최종판결, 유럽은 그러한 경제학자가 거의 없음. 미국은 진리란 전문가에게 위임, 유럽은 토론을 통하여 도출한 것이 진리. 현재 많은 사회적 이슈에 재판이 끼어드는 것으로 정치가 설 자리가 없어짐. 판결이 나면 더는 논란이 끼어들 자리가 없음.

 

병선: ‘비영어권 영어토론 대회거기서 우승한 덴마크 아이. 우리는 어릴때부터 교사와 협상을 하며 자랐다. 숙제 등에 대하여. (나 바빠서 그거 다 못할 것 같아요)

 

지숙: 우리는 어린아이가 잘 모르기 때문에 맡기지 않는데, 아이들을 전적으로 믿기 때문에 그런 협상이 가능한 것 같은.

 

형원: 덴마크 뿐 아니라 교육에 있어서 yes/no에 대한 절대적 선.

공적인 장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 예를 들어 이 자리에서 나의 의견을 표출하고 그런 방법이 내가 교육받아 온 방식의 표출. 일본의 지역 정당 후보들 교육을 위하여 엄청난 코스가 있음. 우리나라는 일단 운동권이나 진보적인 곳에 들어서면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하지, 훈련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음. 자유든 평등이든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고 잘하는 것은 유창한 것과는 다르다. 마음이 통하고, 진정한 것.

김용민씨라고 목사님 아들, 김어준씨랑 같이 활동하는. 팟캐스트에서 콘돌리자 등에 대한 수위 높은 성희롱. 이 사람은 언어에 대해 더불어 살기 위한 기본이 부족.

 

23. 전체주의와 풀뿌리

-발제문 생략-

공동체 위에 인간일수도 있다. 공동체가 제공하는 무대 위의 인간. 공동체 안에 인간이 있다는 비유가 맞는 것일까?

 

병선: 아렌트는 굉장히 감정, 가치를 탈각시키고 형식과 제도만을 보자는 것으로 보이고, 함석헌은 이것저것 다 집어넣어서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

 

형원: 지사적으로 느껴져서 관심이 안가는.

 

병선: 정치적 인간을 계발하는, 같이 획득하려고 노력하는 것, 지사적인 것.

 

형원: 감정, 논리를 구별할 것이 별로 없고, 굉장히 뭉뚱그려서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더 가깝게 갔다고 느낀다. 인간이 가지는 생의 의지라는 것이 극복하고 나아가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근사하지만 굉장히 추상적. 남의 의견을 의지로 받아들이지 말 것. 생의 철학 같은 경우는 개인적 의지를 강조, 여기서 말하는 용기는 나서서 말해!’와 같이 가벼운 것이지만 그것도 쉬운 것은 아니다. 함석헌씨의 주장이 입신양명으로 나아가자는 아니지만 개인이 어디까지 갈 수 있나 보자. 인 것 같아서 위험 할 수 있는.

 

형원: ‘살아가겠다의 저자의 시각은 지식인이 아래로 내려가겠다는 식의 시선, 근데 아렌트는 그러한 계급의식이 전혀 없음. 민중에 대한 시각, 그런 것이 전혀 없음. 깨어 있는 사람들이 내려가야한다 식의 주장이 전혀 나타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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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젊은이들이 사는 방식

 

일본 젊은이들의 행복도가 높은 이유를 저자는 2장 [작은 공동체 안으로 모이는 젊은이들]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힌다. 자신이 ‘이보다 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p134) 그리고 마치 한마을에 사는 주민들처럼 ‘동료’가 모인 ‘작은 세계’에서 일상을 보내는 젊은이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행복한 이유의 본질이라고 말한다.(p141) 그럴 수도 있겠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더 이상 궁금한 게 없으므로 책을 읽을 흥미를 잃었다.

 

그런데 4장 [일본을 위해 일어서는 젊은이들]에서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참가자들이 ‘즐거워’하는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라는 마음을 갖는지 하는, 동기부여의 측면이 더 중요하다(p214)는 말이 관심을 끌었다. 그들은 ‘친구’ 혹은 ‘동료’가 생겼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일단 그곳이 ‘마음 둘 곳’이 되어 버리면 최초의 목적성은 ‘냉각’된다는 우려를 비친다. 일단 조직에 합류하면 조직 자체가 선(善)이 되어버리는 문제점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6장 [절망의 나라에 사는 행복한 젊은이들]도 꽤 흥미로운 장이다. 저자는 행복의 조건으로서 ‘경제적인 문제’와 ‘승인의 문제’ 두 가지로 고찰한다. 정사원과 프리터의 급여 격차가 그리 크지 않다는 점, ‘가족 복지’(금수저/흙수저!), 나이가 들수록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승인에 있어서 연인과 친구의 존재,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손쉬운 승인 사회도 재미있는 관찰이다.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사회변화를 이루어왔으므로 일본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예견하는 것이었다. 일본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우리 젊은이들의 모습을 읽고 차이를 살피고 앞날을 예견해 보기도 한다. 지금의 ‘헬조선’은 일본보다 열악하다는 평판인 듯 싶은데 우리 젊은이들은 어찌 살아가야 하나라는 걱정을 하며 마무리한다.

아렌트의 정치 1장

함께 읽기 2015. 10. 11. 15:4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권정우, 하승우 아렌트의 정치

-1, 수용소와 무슬림-

 

아우슈비츠가 악명 높은 이유는 희생된 이들의 숫자 때문이 아니라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했던 비인간성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수용소에 살았을 때도,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용소: 전체주의 권력이 총체적 지배를 위하여 만든 실험소

 

1. 인간에 대한 완전한 지배는 가능한가?

전체주의는 여타 체제들과는 다른 차이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운동으로의 생명력이다. 근대의 국민국가 체제라는 것은 헌법, 영토, 국민이라는 배타적이고 제한적인 권리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전체주의는 우선 헌법을 무시해버렸다. 법이라는 체제대신 숙청, 테러, 비밀경찰들과 같은 비공식적인 방법들을 이용하였다. 정부 조직이나 관료제도 등도 무시하였다. 영토는 세계정복의 운동으로 밀고 나갔으며 국민은 지속적인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주입으로 확보하였다. 비밀경찰 등은 서로가 누구나 적이 될 수 있다는 공포를 심어 놓는다. 이에 아렌트는 전체주의 체제를 실체도 없고, 정해진 모양도 없는 체제라고 불렀다. 체제가 없다는 것은 곧 신속함, 속도전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뜻이다.

 

2. 수용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나?

<수용소는 가장 인간다운 조건인 인간의 다원성, 개성, 자발성을 철저히 통제하는 장소이다.>

Q.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삶과 죽음과 연관된 존재인데, 삶과 죽음은 기억으로 연결 되어 있다. 생명이 끝이 난다고 해서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다. 타인이 추모라는 의례를 통하여 망자를 기억할 때 그는 아직 살아있는 존재인 것이다. 전체주의 수용소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조건, 근거, 형식을 완전히 지배하고자 한다. 수용소에 갇혀 이름을 빼앗기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이름이 기억되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실험체가 된 수인들은 인간 존엄의 마지막인 자살의 자유조차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수용소는 이렇게 인간을 동물로 만들어 버린다. 이 극악한 수용소는 그저 지나가는 운동으로 소멸됬을지도 모르는 전체주의를 극단으로 몰아붙이게 되었다.

 

3. 왜 인간은 제 발로 가스실에 들어갔나?

수용소에서 인간은 완전히 벌거벗은 평등, 아무런 욕구도 충족되지 않는 완전한 고립 속에 각각이 실험체로 존재한다. (p.47)

수용소에 갇힌 이들에게 더 이상 명예, 삶의 고귀함 등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간수들도 그들의 그러한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렇게 갇힌 이들 스스로가 쓸모 없게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이러한 인간 스스로가 느끼는 쓸모없음과 허무는 전체주의 지배의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이다.

 

무슬림: 복종하는 그들의 모습이 마치 엎드려 기도하는 무슬림같다고하여 붙여진 수용소의 은어

            그것이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가만히 엎드려 복종하는 것)


4. 누가 아이히만인가?

아이히만은 히틀러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한다거나 전체주의에 심취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 너 친위대 안할래?”라고 묻는 질문에 그러지 뭐라고 답하고 수용소에 들어가게 된 것이 전부였다.

사람들은 아이히만이 악마이기를 바라였으나 어쩌면 그는 그저 타인과 말하는 능력, 타인의 입장에서 공감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명령만을 이행하는 무능한 인간일 뿐이었다.

 

아우슈비츠가 박물관이 되기에는 이르다고 느껴지는 지금, 우리는 과연 타인과 대화하고 있을까?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고 있을까? 



151011아렌트의정치_혁명과풀뿌리.hwp


151011아렌트의정치_혁명과풀뿌리.pdf



아렌트의 정치_권정우하승우_2부 전체주의와 풀뿌리_혁명과 풀뿌리

과천녹색당 세상을 바라보는 몇 가지 시선공부모임 _ 깃털 | 2015.10.11

 

1980서울의 봄에 다시 열린 정치의 장.

전두환 계엄사령부의 비상계엄, 광주항쟁, 통일주체국민회의 체육관 박수, 전두환 대통령 취임.

정의사회 구현’, 가짜 야당 + 통금 해제, 교복 자율화, 3S정책 + 삼청교육대와 수용시설

경기 호황. 사적인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게 중산층이라는 메시지. 마취.

잠시 열렸던 자유의 공간은 폐쇄되고, 노골적 폭력과 은밀한 거래, 위선적 만족감이 정치세계의 등장을 가로막음.

광주항쟁의 기억, 새로운 조직운동.

 

질문 : 우리 사회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은 왜 정치를 활성화시키지 못했나?

 

1. 자유로서의 혁명은 왜 어려웠을까?

 

혁명 : (권력 교체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행위자가 계속 등장할 정치의 기본틀 다시 만들기. 헌범 제개정, 시민 정치활동을 보장하는 기구와 제도 만들기.

 

19604월항쟁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 “질서를 지킵시다

남북 대치 현실. 시민들의 자기 검열. 질서를 내세워 이미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사람들만이 사건 이후과정을 주도하게 함.

질서를 지켜 = 너는 목소리 내지 마. = 비지식인, 비엘리트, 청소년, 빈민, 농민 .

항쟁의 정치행위자들은 헌법 개정, 정부 기구제도 개혁을 위한 공적 토론에 참여하지 않고/못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풍기문란을 막고 질서를 세워야 한다는 논리가 열정을 가로막음. (권명아, 음란과 혁명). 혁명 이전에 내재해 있던 불안감의 투영.

엘리트 패닉’(Rebecca Solnit) : 공황에 빠진 대중과 영웅적 소수? “(엘리트의) 사회적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 빈민과 소수자와 이민자에 대한 두려움, 약탈과 경제범죄에 대한 강박관념, 치명적인 무력에 기대려는 마음, 헛소문에 기초한 행동 엘리트의 공포. 매우 중요한 개념.

주요 행위자는 대학생 아닌 중고등학생과 시민. 기록은 대학생을 주역으로.

경제, 생계, 임노동의 발목잡기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국회 해산 없는 양당 타협, 50일 만에 마련된 헌법 개정안, 민주당 압승, 윤보선 대통령 선출

정치는 다시 기성 정치인의 몫이 되었다.

 

1987년 전후

1985년 김영삼, 김대중의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의제는 개헌으로.

1987년 호헌 대 호헌철폐. 대통령 직선제 개헌 쟁취 운동 - 박종철 사망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 610 30만 명, 626 150만 명.

노태우 후보의 629선언 :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시국사범 대폭 석방.

개헌 논의는 야당만이 참여. 시위, 조직활동, 노동자투쟁은 탄압.

604월항쟁과 마찬가지로, 헌법 개정 기회는 시민의 참여로 마련. 시민의 다양한 목소리는 대통령 직선제 문제 하나로 축소.

당시의 목소리들은 헌법 개정에 얼마나 반영되었나? “8시간 노동으로 생활임금 쟁취”, “민주노조 결성”, “통장에서 대통령까지 내 손으로”, “공정보도 언론각성”, “경제침략 자행하는 미일 외세 몰아내자”, “농민이 빚을 져서 야반도주한 후 목매어 자살하게 만든 현 정권 즉각 퇴진”, “잔업특근, 철야작업 없이도 노동자가 먹고살 수 있게 힘쓰자

민정당, 민주당 8인 정치회담이 헌법 개정 과정 주도. 48일만에 개정안 확정.

헌법 개정 과정은 민주주의의 뿌리를 단단하게 하지도, 새로운 정치공간을 열지도, 시민의 사회경제적 권리를 강화시키지도 못했다. 대통령을 뽑는 절차와 선거가 주요 협상의제가 되었다.

제헌의회파CA : 김문수, 심상정, 유시민, 박노해 등.

 

아렌트의 시선으로 본 4월항쟁과 6월항쟁의 공통된 특징

1) 대안 정치세력 구성 없이 공명선거, 직접선거 외침. 시민들이 헌법 개정 과정에 참여하여 공적 자유와 행복을 느낄 기회 박탈. 기성 정치인이 독점. 자유를 지속시킬 틀 만드는 데 실패.

2) 개헌 주도세력은 철저히 기성 정치세력. 논의는 국회 내부로 제한.

3) 항쟁의 정치행위자들이 이후 사라짐. 대학생? 여성, 노동자, 도시빈민, 농민, 심지어 초등학생. 타자와의 세계 공유 없이 특정 주체가 중심이 되어 세계를 독점. (소위 386, 전대협)

4) 서울 중심성, 국가 중심성 강화. 부마항쟁, 광주항쟁, 지방의 사건과 지방의 죽음.

결국, 한국에 서구와 비견할 혁명들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혁명정신을 지속시킬 정치공간을 구성하지 못했던 것.

 

2. 고난과 슬픔의 정치는 가능한가?

 

함석헌 : 아렌트와 비교할만한 사상가

사악한 세력과 맞설 때 저기다 대고 하지 마시고 민중을 향해 데모를 하세요. 그래서 나라라는 건 이렇습니다. 이렇게 해가지곤 민주주의가 안 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권력을 향해 징징대는 시위 하지 마라. ~해주세요.

김상봉의 함석헌 : 고난과 슬픔을 대면하는 자의식은 슬픔과 하나 되어 체념하지 않고 불행한 현실을 부정할 또 다른 현실을 사유하게 된다. 슬픔과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 자기를 억누르는 모든 타자적 힘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짐으로써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공감하기 어려움.) 함석헌의 사상은 우리가 겪는 사회 부조리를 고난과 슬픔으로 받아들이되 그것을 우리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여 주체가 되기를 원한다. 나와 우리의 슬픔, 이런 공통의 슬픔은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용기를 낼 수 있는 정서를 형성한다.

슬픔과 동정심 : 동정심이 인간관계에서 차이와 거리를 제거하는 반정치적 감성이라면, 슬픔은 서로 마주 보면서도 자신이 주체임을 인식하는 감정. (자의적인 구분이거나, 개념의 오용. 동정심이 pity라면 그럴 수 있으나, sympathycompassion이라면 그렇지 않음. 슬픔은 매우 애매.)

어두운 시대에 슬픔을 기름 삼아 자신을 태울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어 희망의 불이 반짝인다.

김상봉의 서로주체 : 만해, 다석, 함석헌, 소월, 윤동주. 자기상실 속에서의 자기실현. 아렌트의 비지배non-rule’와 닮았다.

정치와 자유 : 저항하는 것이 곧 인간. 나를 발전시켜 완전에까지 이르자는 것이 인격. (현재의 시공간과 나의 상태에 저항하여 나아가고자 하는 생의 의지를 말하는 듯하지만...)

우리의 하나는 하나 속에 전체가, 전체 속에 하나가 있는 그런 개성적 하나”. (온 인간. 글로벌 시티즌.)

자유와 우정 : 자유를 찾아나서는 길은 자신의 자유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것임을 깨닫는 과정이고, 동료시민과의 우정을 키우는 과정.

아렌트의 노동, 작업, 행위 : 함석헌의 맞춤(適應), 대듦(拒否), 지어냄(創造). 베르그송의 영향. elan vital, 생명의 도약.

스스로 하는 민의 종합 행동이 정치. 길거리에서 웅성거리는 생활꾼의 정치.

연방국가의 이상 : 자치 공동체, 연방, 세계가 한 나라로.

씨ᄋᆞᆯ : 어리석고 못나 부정적인 존재이지만 그 속에 얼을 품고 있어 주체의 전환가능성을 내포한 존재. 꿈틀거림. 수동적이지만 능동적인. 삶의 절대이며,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터지고야 마는. 그러므로 민중의 바다로.

8-90년대 맑스-레닌주의에 의해 밀려났으며, 혁명을 지속시킬 자유와 정치에 관한 사유도 위축되었다.


3. 우리 시대에 정치를 부활시킬 방법은?

 

박근혜 시대, 우리는 전체주의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다. 파괴된 세계를 복구하고 정치적 자유를 지속시킬 방법 찾아야.

기업권력의 부상. 다운사이징, 구조조정, 괴멸된 노동조합, 노동기술의 무용지물화, 해외 이전, 규제완화. 공포의 경제와 통제 시스템. 경제적 타격과 탈정치화. 경제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시대.

살아남는 일에 급급한 사회에서 정치는 부활하기 어렵다.

아렌트의 우려 : 사회가 정치를 파괴시킨 상황.

공적인 장에 기꺼이 나서려는 용기와 그 용기를 쓸 곳(공간).

시민의회 : 공청회, 합의회의, 시민배심원제도, 공론조사, 시나리오 워크숍, 협력적 의사결정 제도 등.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대립을 넘어서기 위한 설계들 존재.

헌법개정과 시민의회

내가 약하다는 냉소와 주변 사람들에 대한 폭력. 나서는 사람에 대한 시기와 왕따. 그렇게 나는 부속품이 된다.

탄생성이라는 인간의 기적. 정치의 가능성. 일상적 삶에서 실현되는 교육.

땅과 종자를 지키는 일은 (비정규, 일용직) 노동자들의 운동에도 과제가 될 수 있다.

슬픔과 고난의 정치. 개별화된 슬픔 아닌, 정치로 이어지는 슬픔. 정치적 악용이라는 금기 넘기.

투덜거리느니 차라리, 투표를 거부하자, 미디어를 치우자, 외부에서 나를 조종하는 것들을 조금씩 떠나보내자.

권위주의 사회 : 청년이 스스로의 현실 생활에 대해 의식을 지니지 않고, 그리하여 멍청하게 무위도식하거나 맹목적으로 복종한다는 것에서 찾아짐. (W. Reich)

정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정치. 타자의 얼굴을 맞댈 때에만 우리는 정치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마치며

권력의 문제, 권력의 독점과 배제의 문제 : 배제를 통해 권력을 독점하고, 그 권력의 행사를 통해 참 정치의 공간과 가능성을 파괴하는, 현실 권력의 문제를 다뤄야.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어 말과 행위를 시작하는 용기, 그곳에서 대화가 시작되고 새로운 이야기가 지어질 것이라는 믿음에서 무엇이든 시작된다. 자유를 위해, 숨지 마라.

    - 정치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제2의 탄생에 버금가는 사건이다. 120. 그것은 공론장에서 말과 행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또 다른 자신이 된다는 것.

공동체와 인간에 대해 생각해보자.

    - 공동체 안의 인간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무대) 위의 인간이다.

    - 우리는 공동체에게 (정치경제적 공동체로서,) 노동과 작업을 조직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공동체를 경영하는 공론장을 통해 자유로운 인간들의 말과 행위가 꽃 피는 무대, 즉 정치 공간이 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공동체는 과거의 어떤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 아리스토텔레스 "폴리스는 단순한 생존을 위해 형성되지만 훌륭한 삶을 위해 존속하는 것." 기막힌 표현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공동체에 대해 단지 책임과 의무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무대를 통해 멋진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게 정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