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나눔

카테고리 없음 2015. 11. 30. 02:46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서형원, 박정원, 장예정, 홍지숙, 박병선, 이한진, 신은희-

11268시 삼오사 공사

 

발제문 발표

· 박정원 발제문 발표

 

형원: 그냥 이 사회의 현상이 이렇다 하는거지 어떠한 해결방법이나 그런 것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정원: 우리집 오타쿠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시밀러크루를 수도 없이 수집.

 

한진: 일종의 포켓몬 스티커 같은거.

 

지숙: 그런 것도 오타쿠인가? 그런건 엄청 재미있는데!

 

정원: 물건뿐 아니라 그들의 사람 관계에 대한 것도 조금 이해가 되었다.

 

지숙: 그런건 일종의 맹세 때문 일수도 있음.

 

병선: 예를 들어 십자가 이런거 모으는 그런 것인 듯. 본질이 아닌 것들

 

병선: 옛날에는 큰 이야기를 진짜라고 여겼는데,

 

형원: 지금은 건담이나 판타지 소설등 일종의 이야기였는데 지금은 그 데이터베이스가 모두 분해되서 그것에 집착하는 것

 

정원: 그게 분해되서 하나의 큰 비야기를 만든 것

 

형원: 아예 이야기가 안되는, 어떠한 데이터 조각을 소비하는 것

 

지숙: 왜 그런거래요?

 

형원: 그건 책에서 깊게 설명하지 않아요. 예전엔 어떠한 작가가 있었는데 이제는 마법천자문처럼 어느 팀이 만드는거지 작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정원: 23(p.80) 커다란 비이야기. 커다란 이야기는 진리나 절대적 어떠한 것을 믿었을 때이고, 커다란 비이야기는 그것을 대신하는 것. 톨킨이나 그런 것도

 

병선: 톨킨이나 그런 이의 작품은 그 세계를 구성하는 세계관이 있는데 건담이나 이런 것은 그 이야기의 구성이나 역사와 무관하게 캐릭터에 집중

 

형원: 톨킨은 수만년, 수천년의 이야기를 새로 쓴 것인데 그건 하나의 큰 이야기인 것, 그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 이야기만 담아낸 것이 호비트, 반지의 제왕이 된 것. 건담이나 에반게리온은 엄청나게 탄탄한 세계관을 깔아두고 그것에 대한 설명 없이 이야기만 몇 개 던져주고 사람들이 그 밑에 깔린 세계관을 찾아가게 하는 것. 그 밑에 깔린 데이터는 데이터일뿐 이야기가 아니다.

 

· 서형원 발제문 발표

형원: 미국의 소비자 대중, 일본의 오타쿠. 동물화 된 인간. 이라는 말에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고 생각함. 그러나 이 중심에는 타자가 없다. 욕망은 간주체적이기 때문에 나를 중심으로 놓고 생각하기 어려움.

 

지숙: 이런 상황에는 이렇게 반응해야한다는 것을 항상 주입되고 있음. 회사나 군대에서 특히. 상황, 상황에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정상인데 그런 것이 이상하게 주입되고 있음.

 

형원: 지금의 우리 사회가 그렇게 만들고 있음. 그래서 인간관계에 지친 3, 40대가 혼자 산에 가는 것이 그런 이유. 타자와의 만남에 지쳐서.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은 곧 헤어질 사람으로 진짜 관계가 아님. 우리의 언어로 극복해야 한다. 첫째, 내가 내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프로야구나 영화를 보았을 때 느끼는 그런 감정들.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면 가짜라는 것. 타자에 대한 욕망.

 

지숙: 인간이 독립적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많은 책들이 쏟아지고 있음.

 

정원: 독립적인 것과 다른 이와 함께 사는 것 둘은 함께 가야함.

 

형원: 옛날 선비들처러 청빈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혼자 살아도 추레해보이지 않는 일종의 기준을 세우고 맞춰가려는 것은 왜곡된 욕망. 고로 우리의 언어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의 사회는 내가 선택하는 것은 극히 일부이더라도 세상에는 수없이 많고 다양한 선택지가 있기를 바라고 있다.

 

정원: 발제문이 거의 책의 언어가 아니라 감상을 세밀하게 적으셨어요.

 

지숙: 이런 것들을 공부해서 이런 것이 10, 20, 30, 4,50대까지 올라갔을 때, 내가 오타쿠라는 그런 것을 깨달았을 때 너무 허무할 것 같아. 세상이 완전 무너지는 것인데 그걸 무너뜨리려고 할까?

 

형원: ‘마음 둘 곳이 있어야 깨닫게 되는 것. 나와는 다르게 사는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삶이 괜찮아 보일 때, 새롭게 마음 둘 곳을 찾아야 지금의 것을 무너뜨릴 수 있다.

 

한진: 책에도 나오듯, 오타쿠도 마냥 고립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소비하고 커뮤니티가 있지만 곧 도태되는 것에 집착하는 것.

 

병선: 흔한 동호회와 같은 듯. 테니스, 사진, 등산, 마라톤 등등 혼자 하는 종목인데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함. 스마트폰, 특히 sns가 오타쿠의 수집을 자랑하기에 굉장히 좋게 만든 것 같다. 혼자 하는 행위인데 그걸 계속 사진 등으로 업데이트함.

 

한진: 인스타그램이 그거에 엄청 적절한 플랫폼인 듯.

 

· 박병선 발제문 발표

p.126.

심층에서 거대한 이야기가 사라진 까닭은?

 

병선: 정도의 법을 인간에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는 것이 감동.

 

형원: 이성적인 기획, 도구적인 기획으로 어떻게 인간이 원하는 것을 창조하는지에 대한 이야기. 신화적인 이야기와 이상적인 기획을 크게 나누지 않았음. 저자가 말하고 싶던 것은 대중은 큰 이야기를 잃었다는 것. 세상을 어떻게든 이어가려는 사람과 하루하루 삶을 연명하는 대중으로 구분. 소수의 엘리트는 주도면밀하게 세계를 기획, 대부분의 사람은 행복한 돼지가 되어 살아갈 것이라고 했던 절망의 나라 행복한 젊은이들과 같은 맥락. 배고파는 큰 이야기를 잃은 것은 지배층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지배층은 이성적인 기획으로 큰 이야기 안에서 살고 있음. 그것이 신화는 아니지만.

 

병선: 지배층이라고 하였지만 지식인 계층이 그러한 듯.

 

형원: 지배층이 맞는 것 같은게 지금은 진정한 지식인이 없는 듯.

 

예정: 나는 아직도 왜 오타쿠에 대해서 이렇게 심도 깊게 분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병선: 이 책에서는 포스트모던과 오타쿠의 문제가 서로 다른 것이라고 하지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은 항상 그래왔던 것 같다.

 

형원: 동의하는 구조가 있다. 대중은 비슷하게 항상 그래왔던.

 

예정: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 같은 큰이야기들과 하나의 캐릭터를 소비하는 것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형원, 정원: 큰 이야기나 그 세계관을 소비하는 세대와는 다르게 하나의 캐릭터를 소비하는 것은 타자가 빠져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 그것은 세계와 연관지었을 때 세상에도 관심을 갖지 않게 됨. 가령 교과서 문제에 전국민이 연대하여 어떠한 액션을 취하는 것. 그런 타인과의 연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됨.

 

· 이한진 발제문 발표

형원: 이 책 자체가 스노비즘이라는 배고파의 지적이 맞는 말인 것 같다.

정원: 지난번에 이어서 일본 작가의 책을 두 번째로 읽고 있는데 굉장히 간단한 이야기마저도 엄청난 수치를 제시하여 쓰는 것이 굉장히 책을 잘 쓰는 것 같다.

 

병선: 과거의 책들은 대중을 향하여 쓴 것일까? 과거에는 책을 써대기만 하고 대중은 항상 빨려갔을 뿐. 대중이 생산의 주체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이 대중들이 컨텐츠를 소비해야 돌아가는 사회가 되었다. 과거 지식인은 부조리한 구조와만 싸워왔지만 지금은 부조리한 구조와 소비해야하는 대중과도 싸워야 한다.

 

형원: 과거, 조선의 선비나 루소 등이 살던 시대의 대중과 별반 다르지 않는 듯.

 

정원: 옛날에는 어떠한 진리 추구를 위한 책 위주였지만, 지금은 세계를 진단해주는 책이 인기가 많은 것 같다.

 

 

 

다음 모임: 12204

다음 책: 한국 현대사 산책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이한진

카테고리 없음 2015. 11. 25. 19:49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읽고 [이한진]

읽는 내내 굳이 이걸 이렇게 어렵게 분석을 해야하나 싶으며 읽다가도 그럭저럭 이해가는 부분도 있고 해서 전체적으로는 문안하게 읽었던 것 같다. 게임 분석을 엄청 장황하게 하는데 단순히 그냥 더 자극적이고 재미있게 만들다보니 이 지경에 이르렀지라는 생각을 떨구기가 힘들었는데 다 읽어보니 그런 관점으로도 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식으로 읽어나갔다. 오타쿠를 통해서 무언가를 읽어냈다는 것보다 시뮬라크르, 데이터베이스형, 스노비즘, 모에 등 새소한 용어들을 배우면서 생각해볼만한 것들이 많았던 것 같다. 읽다가 네스케이프 네비게이터 나오는거 보고 이거 좀 오래된 책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그 당시엔 스마트폰이 없었겠구나 상상해봤다. 불과 10년 조금 넘은 것 같은데. 데이터베이스화 되어가는 거라든지 사교성이 떨어져간다든지 하는 것들이 지금과도 들어맞고 점점 그렇게 되어가는 방향은 부정할 수 없어보인다. 이제는 스마트폰을 넘어서 VR의 세계가 표면위에 올라오려하고 있다. 언젠가는 하겠지가 바로 앞에 와있다. 놀라우면서도 문득문득 소름 돋는 일이다. 결국 얘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제목에 다 들어가있지 않나 싶다. ‘동물화’되는 것.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뭔데?라는 약간은 익숙한 질문을 던져보게 만들게 되었고, 책을 다 읽고 나니 나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정확히 어떤 부분 때문에 그런지는 콕 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고전이나 클래식을 더 많이 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더라도 내가 좋아하던 고전영화를 더 많이 봐야지싶었다. 좀 더 단순하면서도 시대의 가벼움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지켜갈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을 읽고 - 박정원

함께 읽기/기타 2015. 11. 25. 15:15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세바시 / 아즈마 히로키『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15.11.25 / 박정원

 

오타쿠와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오타쿠’에 관한 책인데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책제목을 보고 얼른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1장, 2장에서 오타쿠, 포스트모던, 이야기 소비, 커다란 비이야기, 모에 요소, 데이터베이스 소비, 시뮬라크르, 스노비즘, 해리적 인간의 개념까지 읽고, 마침내 9절 ‘동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책의 의도를 이해하게 되었다.

 

‘동물의 욕구는 타자 없이 충족되지만 인간의 욕망은 본질적으로 타자를 필요로 한다.’(p150) ‘동물이 된다’는 것은 간(間)주체적인 구조가 사라지고 각자가 각자의 결핍-만족의 회로를 닫아버리는 상태의 도래를 의미한다. 현재의 소비사회에서는 소비자의 요구가 가능한 한 타자의 개입 없이 순식간에 기계적으로 충족되도록 날마다 개량이 거듭되고 있다. 우리들의 사회는 최근 수십 년간 확실히 동물화의 길을 걸어왔다. 오타쿠들의 소비행동도 또한 ‘동물적’이라는 형용에 그대로 부합한다. 현재의 오타쿠들은 감정적인 만족을 더욱 손쉽게 달성해주는 모에 요소의 방정식을 찾아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을 소비하며 도태하고 있다. 저자는 1995년 이후의 시대를 ‘동물의 시대’라고 명명하고 포스트모던화 전체 속에서 생겨난 것이며 결코 국내적인 현상은 아니라고 한다. 예전에는 공감의 힘이 사회를 만드는 기본적인 요소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감정적인 마음의 움직임은 오히려 비사회적으로, 고독하게 동물적으로 처리되는 것으로 크게 변하고 있다. 포스트모던의 데이터베이스형 세계에서는 더 이상 커다란 공감 따위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의 인간은 ‘의미’에 대한 갈망을 사교성을 통해 충족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동물적인 욕구로 환원함으로써 고독하게 채우고 있다. 거기에서는 작은 이야기와 커다란 비이야기 사이에 어떠한 연계도 없고, 세계 전체는 단지 즉물적으로 누구의 삶에도 의미를 주지 않는 채 표류하고 있다.

 

여기에서 필자가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오타쿠계 문화의 변천과 그 바깥쪽의 사회적 변화와의 관련성을 이끌어내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오타쿠계 문화 같은 기묘한 서브컬쳐를 끌어안게 된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소감문

함께 읽기/기타 2015. 11. 25. 12:54 Posted by 서형원


151125동물화하는포스트모던_소감문.hwp


151125동물화하는포스트모던_소감문.pdf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소감문_아즈마 히로키_선정우

과천녹색당 세상을 바라보는 몇 가지 시선공부모임 _ 깃털 | 2015.11.25

 

 

너는 네가 네가 아님을 깨쳐야 네가 되기 시작할 것이며, 네가 네가 되기 위해선 타자 및 타자에 대한 욕망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들을 동료, 도반, 혹은 벗이라 하자.

 

동물화한 인간 : 전후 미국에서 등장한 소비자 대중, 오타쿠, 그리고 우리.

  • 인간의 동물화 : 사실은 아무 설명이 필요 없이, 직관적으로 옳다.

  • 주어진 환경을 부정하거나 환경에 대해 투쟁하지 않는 인간.

    욕망 없는 욕구 충족. 배고프면 먹고, 영화를 보면 울고/웃고, 답답하면 여행을 떠나고. 이 모든 행위가 상품과 서비스의 소비로 충족가능하다. 상품과 서비스의 선택 가능성은 한없이 광대한, 그래서 나는 자유롭다고 말하게 할, 데이터베이스로 주어진다. 여기에는 뭐가 없다? 타자/타인이 없다. 타자가 없는 것이 편하다. 그래서 타자가 필요 없는 인간이 곧 오타쿠다.

  • 중심성의 왜곡된, 상업적으로 주입된 강조. 타자를 지우면 나는 상품들을 대면한다.

  • 타자가 필요 없다. - 간주체적 욕망이 없다. - 행위(아렌트)가 없다. - 정치가 없다. - 정치경제 지배 엘리트의 먹이가 된다.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동물화된 인간들의 욕구-충족 회로 위에 미국식 자본주의와 엘리트 정치가 번성한다.

  • 타자/간주체성을 잃으면, 토목공사는 거미줄 치기, 콘서트는 매미 울음과 다르지 않다.

  • 웰메이드, 우리를 안심하게 한다. 데이터베이스들이 절묘하게/웰 집합되었고, 내가 기성품 같은 울음과 웃음을 잘 터뜨리도록 해준다. 자기 것이 없는 아이히만의 언어와 같다.

  • 저항 음악? 데이터베이스에서 골라낸 저항의 클리셰들. 저항 음악에 감동? 기성품 같은 감정의 데이터베이스에서 골라낸 감정의 클리셰들. 저항적 음악이 아닌, 진짜 저항 음악이 있겠지.

  • 동물화된 인간은, 결핍-만족의 반복이라는 돼지우리에 갇힌 인간의 모습을 의미한다. 무수한 선택지들(데이터베이스)과 신성불가침한 선택권이 있다. 이 얼마나 자유롭고 존귀한 존재인지.

  • 그러니까 우리는, 즉물적인 약물중독자다. 취미도 취향도 아니고, 약물중독이다. 주입된 욕망이며, 욕망의 흉내내기다. 이 욕망이 가짜라는 건,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멈출 수 있다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타자와의 게임, 밀고 당기기, 간주체적 행위가 없기에 불편하면 멈추고, 내가 멈추면 실제로 멈춰지는 것이다. 성가신 인간관계가 없는 행복하고 자유로운 세상이다.

  • 거세된/불임의 욕망이라는 의미에서 가짜 욕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진짜와 가짜의 차이는, 손쉬운 성기적 욕구 충족과, 인간의 성적 관계를 획득하려는 노력 사이의 차이와 같다.

우리의 언어를 통한 나의 회복

  • 내가 내가 아닌 것들로 조립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물론 여러 부품/데이터 중에 내가 선택했을 순 있으나그 어떤 것도 내가 만든 건 없고그런 나는 아무 이야기도 지어내지 못한다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만들어지는 내가 아니면 가짜다타자에 대한 욕망우정에 대한 갈구가 없으면나는 가짜다연결 짓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척하는 해리적 인간들그러나 연결/이야기를 대체한 동물적인 욕구의 충족으로 채울 수 없는 고독은결국 터진다인생이 망한다는 말이다. 

  • 진짜 나의 언어를 찾아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언어를 만들자그것으로 우리 삶과 우리 미래를 직조하자.

사회를 구성하며, 나를 초월하는 신화를 이야기로 직조했던 인간들. 장구한 역사, 드높은 가치, 지고한 담론, 거대한 판타지로 이어졌다. 망망한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욕망은 이들 과거의 욕망들과는 다른 것일까? 초월에 대한 갈망에 어떤 보편성은 없을까? 이때 자유란 무엇일까?

심층(심연)에서 거대한 이야기가 사라진 까닭은 무엇일까.


126.

무엇보다도 계몽이나 이성 같은 커다란 이야기가 처음으로 조락하기 시작한 것이 1차대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역으로 그 조락이 완전히 표면화한 것은 냉전이 붕괴하고 공산주의라는 최후의 커다란 이야기의 망령조차 없어진 1989년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914~1989 : 커다란 이야기의 조락, 근대포스트모던시대의 긴 이행기. 냉소주의와 스노비즘. 

이것이 일본에서는

129

1945~1970: 이상(理想)의 시대, 커다란 이야기가 그대로 기능

1970~1995: 허구의 시대, 커다란 이야기가 가짜로서 기능, 이야기 소비

1995~현재 : 데이터베이스 소비, 심층 자체의 소멸, 표층의 기반은 심층이 아닌 데이터베이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심층(심연)에서 거대한 이야기가 사라진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저자의 말에다 뭘 좀 보태보자면, 

저자는 근대적 이성주의(인간의 이성은 전능하다)1차대전을 통해 조락을 시작했다고 본다. 인류가 이성의 야만성을 목도한 것이다.

1800년대 초반 이성에 대한 믿음은 베토벤의 운명교향곡(1808)에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중세의 권위가 시민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혁명의 열기로 표출되던 시대, 꽝꽝꽝 꽝~! 인간이 개척한 운명이 문을 두드린다. 열어야만 한다. 고통받는 민중들의 고뇌와 삶을 목도했으니 이제 박해와 압제의 시대는 가고 사랑과 해방의 시대가 올 것이다.(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차이코프스키, 엘가 위풍당당행진곡)

하지만 문을 연 결과는 1차 대전의 야만이다.(엘가 첼로협주곡E단조) 쐐기를 박듯 2차 대전이 일어나고 최첨단 기술의 집적이 역사상 최대의 학살을 일으킨다. 신념이 해체되고 인류는 해체되어 개인(소비자)으로 해체된다. 조화(에 대한 믿음)는 사라지고 카오스적인 불협화음이 진실이다.(쇤베르크 등) 마지막 신념으로 소련에 구현된 공산주의가 남지만 실체는 그 허구인 스탈린주의일 뿐이다.

1989년 스탈린주의(옴진리교)가 무너짐과 함께 거대한 이야기가 사라졌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거대한 이야기=유일신에 대한 믿음, 조화와 통합, 이성적인 세계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이 데이터베이스(개인의 자아와 분리된 파편의 축적물)이다. 이제 서사는 사라지고 파편 조합의 소비만이 남았다.......

는 것인데, 그렇다면 거대한 이야기는 어디에서 사라진 것인가? 심층이란 누구의 심층인가? 저자는 아마도 대중(또는 시대정신)을 말하는 듯한데, 정말 시대정신에서 거대서사가 사라졌을까? 저자의 증거는 일본의 미국의 동물적 소비자이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어쩌면 사회 지배층에게서만 사라진 것은 아닐까?

여기서 조셉 캠벨의 말이 생각났다.

 

(예시 : 메소포타미아 지역 아가데의 사르곤왕(기원전 2350년 경)과 바빌론의 함무라비왕(기원전 1700년 경)의 신화)

(농경사회의 우주론적 신화로부터 왕들의 신화, 도시국가의 건국신화가 파생되었다. 이것은) “전설 자체가 우주론적 지평으로부터 개인적인 관련으로 하강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열등한 명상을 낳는다. 즉 신의 이미지 속에서 에고가 소멸(신화적 동일시)하는 대신 정확히 그 반대가 된다. 신의 자세 속에서 에고의 고양(신화적인 과대화)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을 조작하는 기술에 숙달된 자들이 육체를 갖춘 신의 역할을 해내고 그러면서 용케도 양날 도끼로부터 목을 구하게 된 이후로, 이것은 통치자들의 만성적인 병이 되었다.....그러한 속임수의 결과는 왕권을 사제단과 별들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국가를 종교적(성직자의) 제도에서 정치적(왕족의) 제도로 바꾸며, 왕들의 주된 관심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세상의 정복이 될 수 있는 시대를 연 것이었다.”-서양신화 93, 조셉 캠벨 저, 정영목 역.


두 이야기를 연결해보자. 근대적 이성은 도시국가를 건설한 왕들의 의지(에고)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에고가 대중에게 전염되어 집단적 과대망상으로 드러난 것이 근대의 이성주의 아닐까. 왕들이 세상을 정복하려 했던 것처럼 인간이 이성으로써 세계를 건설하려 했던 것 아닐까. 이런 맥락의 세계 건설 스토리가 위에서 말하는 거대한 이야기의 정체 아닐까. 그렇게 보면, 4500년에 걸친 실험이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사건을 끝으로 쫑났다는 것이다. 그 긴 시간동안 인류는 우주론적 지평에 대한 것을 모두 잊어버렸다. 그러니, 세계는 그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일 뿐이라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선언의 근거는? 오타쿠와 동물화한 소비자로 대별되는 현대의 상업주의.

 

사족.

대중이 잃어버리고 있던 우주론적 지평을 찾아주려 한 대표적인 인물이 석가모니와 예수였던 것 같다. 하지만 과거에나 지금에나, 대중과 그 지배층들 사이에서는 그 가르침에 대한 오해가 지배적이었나 보다.

“...부처는 이윽고 이렛 동안 네번째 나무 아래서 해탈의 기쁨을 만끽했다. 이 때 그는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남들에게 전할 수 있을지 가늠해 보다가 당분간은 홀로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 브라마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에게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부처는 그의 말에 승복, 자신이 깨친 도리를 전파하기로 하고는, 자신이 속인들과 함께 살던 도시로 돌아가 정도(正道)의 법이라는 귀한 은혜를 두루 전파했다.” - 세계의 영웅신화 36~37쪽, 조셉 캠벨 저, 이윤기 역.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함께 읽기 2015. 11. 1. 18:35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그동안 우리가 청년을 보는 시각이 얼마나 보수적인 틀에 갖혀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요미우리 신문등에서 요즘 젊은이들의 내향적임을 비판하는 사설들은 우리나라 언론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향적이고, 국가에 관심이 없는 소위 말하는 우리 세대의 경향은 개선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있었다. 그래 우리도 으쌰으쌰 일어나야지. 도대체 무얼 위해, 어떻게,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며 우리가 그러한 생각을 갖게하는 것도 일종의 정치였음을 알았다. 아니 실은 더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으나 그 생각이 내 앞에 문서로 다가왔다. 그것은 엄청난 차이이다. 아마도 이 책이 일본에서 엄청난 열풍을 일으킨 것은 나와 같이 느낀 청년들의 리액션일 것이다.

나느 오래전부터 가족에 대한 신화는 깨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회가 더는 '가족은 화목하다'라는 것을 더 이상 가족의 공식으로 여기지 않기를 바랐다. 내 주변의 많은 가족들은 그렇게 이상적으로 화목하지 않기 떄문이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에 충성해야한다' '국가를 사랑해야한다' 따위의 국가에 대하여 국민이 가져야 하는 태도, '현대의 젊은이는 유학도 가고, 나라 밖으로도 나가고, 투표는 해야하며, 국가가 국민을 필요로 해야할 때 누구보다 빠르고 충성적으로 응해야 한다' 따위의 국가의 신화나 젊은이의 공식도 이제는 깨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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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_후루이치 노리토시_이연숙

과천녹색당 세상을 바라보는 몇 가지 시선공부모임 _ 깃털 | 2015.11.1

 

 

이 책에 의하면, 젊은이의 필요 = 빈곤 해결 + 승인 욕구 해소

   - 빈곤 해결 : 우리 사회에서 프리타를 통해 친구와 놀고 콘서트 가고 여행을 하는 등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생활이 가능한가?

   - 승인 욕구 : 이 책에서 말하는 일본 젊은이의 승인 욕구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 자체이고 생계는 따로 해결 가능.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어떠 일이든 인정을 받으면 바로 금전적 보상으로 전환해야 하는 체계 아닌가? 위나 아래나 모두, 결국 돈으로 보상해달라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왜 그 일을 왜 하냐며. 별풍선.

 

(일본 젊은이들은) “굳이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모두 해결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를 통해 해결. 젊은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저자가 바라본 일본처럼 다양한 문제들인가, 혹은 매우 기초적이거나 생존적인 문제인 건 아닌가? 해결하지 않고도 일본 젊은이들처럼 각자 해법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문제들인가?

 

우리 사회도 행복한 계급 사회로 갈 수 있을까? 의사 결정에 분주한 일등 시민과, 태평하게 하루하루를 소일하는 이등 시민으로 구성된. 생각할 점은, 이른 바 <물적 토대> 문제, 행복한 이등 시민을 만드는 문제. 행복한 이등 시민 = 새로운 식민지.

 

왜 청년일까? 청년을 위로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심지어 청년의 행복을 위해서도 아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유를 잃고 사육되고 착취되며 그날그날을 자기 삶을 소모하는, 그런 사회로 가는 징후가 지금 청년의 삶과 삶의 환경에서 읽히기 때문이며, 청년이 아니라, 내가, 혹은 우리가, 단호히 그런 사회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생각대로 말하자면, “무언가를 하고싶다.” 혹은 이대로는 안 되는데.”라고 말하며, 자신의 지루한 일상을 바꿔줄 강력한 비일상을 희망하는, ‘불끈하는 젊은이들, 분명히 존재하지만 무기력하다. 무기력하기에 월드컵이 끝나면, 봉사 활동을 마치면, 결국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 존재하지만 스스로 활성화되지 못하는 에너지다. 그래서 스스로 정치적으로 무력하고, 그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여기에 간단명료한 출구를 제공하는 기획가planner 내지는 촉진가facilitator가 필요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의지를 가진 촉매 그룹의 필요성을 함의하는 것일 수 있다. 공감을 가장한 푸념어린 동어반복 - “힘들어!” “얼마나 힘들겠어.” - 은 물론이고, 잠시 불끈하고 다시 흩어지게 되는, 월드컵이나 일시적 봉사 활동 같은, 장기 전망에 대해서는 될 대로 되라는 재밌는 활동으로는 큰 절망과 작은 행복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결심만 굳히게 할 뿐이다. 저자는 뜻 있는 집단이 마음 둘 곳으로 여겨지면 당초의 목적 따윈 잊게 된다고 말함으로써, 이런저런 활동들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식의 낙관론에 쐐기를 박는다. (마음 둘 곳이 된다는 게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 활동에 단독적인 의미부여를 하는 경우는 대체로 문제가 있다. 상대화, 맥락화하지 않는 고립된 활동에 머무를 때 말이다.) 에너지의 이와 같은 조직화가 곧 정치요, 이를 담는 그릇이 정치세력 아닐까.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소감문 - 이한진

함께 읽기/기타 2015. 10. 31. 22:1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읽고 (이한진)

일본은 막연하게 우리와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해서 청년들 이야기도 비슷할 것이라 예상은 하고 봤지만 생각보다 더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몇가지 새롭게 생각하게 된 것 중 하나는 일본도 50, 60대 어른들을 하나의 공감대로 엮을 수 있는 것이 경제 부흥시대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 그것은 우리나라 경제가 부흥했던 시기에 일본도 그러했다는 것. 뭐랄까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은 한마디로 박정희 대통령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처럼 당연하게 인식되어지고 있는데, 세계적으로 전쟁 이후에 전반적으로 발전하고 있던 상황이 아니었나 싶다. 이렇게 빨리 되지는 않았겠지만, 그 속도만큼 놓친 것들은 고스란히 남아 있을테니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 가져야하는 태도에서 지금의 젊은 세대까지 찬양하고 따르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책을 통해서 청년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 부분도 많지만 그 부흥을 만들어갔던 어른세대들의 상황, 마음, 생각들을 많이 상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세대론의 관점으로만 보면 놓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점. 예를 들어 청년들의 사망 원인 중에 자살률이 1위라는 것을 표면에 내걸게 되는데 실제로 노인들이 몇 배는 더 자살률이 높다는 사실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보면 청년세대를 살피면서도 전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고 이 시대에 청년들을 통한 어떠한 메시지를 뽑아낼 때 혹은 뭔가 이 시대를 탐구해볼 때 감정적인 부분만큼 객관적인 부분도 놓치지 않고 다각도로 바라보면서 좀 더 근원적인 물음들을 해나가면서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하게 확인하고 공감한 점은 50대 이상 어른 층은 의견들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전체적으로 공감할만한 요소들이 상대적으로 있지만 요즘 청년들은 크게 '젊은이'라는 말로 통칭하기 힘든 만큼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포괄적으로 공감하고 나눌만한 시대적 국면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청년세대에 많은 문제가 있지만 핵심적인 어떤 것이 보인다기보단 산발적인 느낌들이 많다.

가장 생각에 남는 말은 마음 둘 곳이 필요하다는 것’. 어디 젊은이들뿐이겠냐만, 그냥 당연한 본능이겠지만 어딘가 마음이 짠하다. 크건 작건 건강한 모습으로 마음 둘 만한 곳이 늘어났으면 좋겠고(그 틈에 집단적인 애국심이나 내셔널리즘 같은거 말고), 스터디 모임하면서 배움의 효과인지 여러모로 공론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자주 들었다. 한편으론 여전히 여러가지 위기감이 많지만, 한편으로 개인적으로 막연하게만 느겼던 위기감에서 조금은 덜어진 느낌이고 오히려 지금의 젊은이들이 더 잘할 수 있고 이전 세대들보다 보다 좀 더 발전할 수 있는 점들이 있어 보인다고나 할까. 갈 길은 멀어보이고 달라진건 없지만 좀 더 희망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세상을 바라보는 몇 가지 시선 6차 모임

함께 읽기 2015. 10. 29. 00:1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권정우, 하승우 지음, 아렌트의 정치

-세바시 6차 모임, 서형원, 홍지숙, 신은희, 박병선, 이한진, 김지원, 장예정-

 

발췌된 부분은 어려운데 설명된 부분은 허무하다는 느낌이 들만큼 쉽게 설명.

정치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적립된 것과 같은 느낌.

 

추천사&서문

-발제문 생략-

첫째와 둘째의 가장 기본적인이라는 군더더기 있는듯한 표현.

 

11. 수용소와 무슬림

-발제문 생략

병선: 전체주의를 시스템이 아닌 운동으로 정의했다는 점에서 놀랐다. 헌법을 군중심리로 대체하였다라고 생각했다. 국민과 비국민으로 나누는 그러한 모습으로. . 한일월드컵 당시, 축구에 반응하지 않고 지나는 사람에게 ‘Are you Japanese?"라고 묻는 그러한 모습. 2장의 대중과 안전에서 더 이야기하는 걸로.

 

형원: 인간에 대한 완전한 지배는 가능할까? 하는 대목에서. 첫 번째 책에서 노동을 상품으로 만들 수 있느냐?와 같은 맥락의 질문인 것 같다. 대한민국 전체가 인간에 대한 완전한 지배는 가능할까? 에 대한 거대한 실험실이 된 것 같다.

 

2. 대중과 안전

대중에게 먹고 사는 것은 진짜 중요할까?

대중은 누구일까?- 한무리, 덩어리라는 뜻으로 해석. 대중에 섞이지 못할 때의 불안감.

p.73.

아렌트는 계급사회/ 국민국가의 붕괴로 대중이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대중은 왜 통제되어야 하나?

: 리바이어던의 개념으로 인위적 국가를 설명. 리바이어던의 목적은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비전 제시는 아니었다.

: 논의의 장이되는 탁자가 필요하다. 공적인 것은 공동의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세계성을 갖는다고 말하고 세계성은 인간이 탁자를 갖는 것을 말한다.

p.83. “타인을 염두해 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 너무나도 소중하다.”

<은희-그러나 자신의 감정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어떻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지? 하는 의문, 지나친 감정에 대한 경계정도로 이해하였다.>

노동과 행위에 대하여.

작업의 중요성-인간의 직접적인 수작업이 공유나 공동체를 만드는 행위로까지 보고 있는 것. (후에 다시 이 대목 논의)

왜 정치가 중요한가? (다소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껴짐)

p.93. 아렌트는 공적 영역이란 타인의 현존을 기반으로 자신의 차이성을 말과 행위로 드러내는 공간.

 

병선: 노동, 작업, 행위에 대한 정의와 탁자의 이야기, 용서와 약속에 대한 설명의 탁월함에 놀람. (형원 too) 노동은 생존의 영역이다,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형원-생물로서 필요한) 작업은 나만의 행위인 것이며 행위는 타자가 존재하는 공동의 일이다. (지숙-미술작업에서의 작업의 의미와 전혀 달라서 놀랐다.) 작업의 특징을 다른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 오직 나만의 행위인 것이다. 아렌트에게 있어서 정치의 작업이란 건축 등에서의 작업과는 전혀 다른 정치에서의 작업이 있는 것이다. p.91. 혼란을 질서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 인간이며 이것이 작업의 욕구이다.

 

지숙: 행위라는 말이 잘 이해가 안됬는데 나의 발제부분에서 타인의 존재가 행위에 들어있기 때문에 말과 행위는 정치적인 것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소통

 

형원: 레비나스 등의 주장은 타자는 절대적인 타자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해할 수도 없고, 지배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극복 불가능한 절대성을 지니는 대상이 타인이다. 이로 인해 파생되는 안전에 대한 불안감. (타자는 절대적으로 믿을 수 없기에) 용서와 약속. 레비나스는 타자란 성경의 과부나 고아와 같이 이해와 같은 것이 필요 없게 절대적으로 도와야 하는 그런 대상.

 

한진: ‘만남’(더 뒤쪽 단원에서) 노동, 행위와 같은 차가운 개념보다 만남이라는 단어가 더 잘 와 닿았다. 피부로 와 닿는 직접적인 만남이 아니라 어딘가 존재하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에의 주입. 직접 만나본다면,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인권이라는 것이 와 닿게 되듯이. (병선-사랑이 아니라 존중이다.)

 

형원: common sense-한 공동체가 공유하는 어떠한 공감. 말과 행동으로 공유되는 어떠한 것. 그러나 감정은 아니다. 다원성이 갖는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대화의 장에 나갔을 때의 것,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자유로운 인간.

 

병선: 가정에 대한 언짢은 표현. (형원-오늘 날의 가정이랑 다른 가정일 것)

 

은희: 세계성. (p.80-81) 세계를 갖는 것. 함께 이야기하는 탁자가 필요하다. 작업이란 세계를 만드는 활동이다. 작업이란 혼자만의 행위로 한 사이클. p.91를 토대로 작업을 노동과 달리 의미있는 행동이라고 표현했다고 생각. (형원-작업이 세계를 만드는 활동이다? 무슨 의미일까?)

 

형원: 노동에 대한 민감한 논쟁.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노동이란 신성한 것이라는 절대적 믿음.

 

지숙: 내가 말을 했는데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 그건 무엇이지

 

3. 공론장과 자유

-발제문 생략-

한진, 형원: 성경의 말과 같은 말인것 같다. 안전이 보장된 그곳을 떠나서 나아가라.

 

병선: 가정을 엄격한 불평등의 세계이며 노동과 생존의 세계라고 표현(고대 그리스의 사회)

경제학이 굉장히 중요한 학문으로 여겨지는 것이 슬픈 현실이다. 폴리스에서 하던 좋고, 탁월한 것은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를 경제학이 대체.

 

형원: 가정은 지금의 가정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 당시 가정은 생산단위의 하나라고 생각해야 한다. 지금의 가정은 그마저도 못하는 듯.

 

병선: 그것이 공론장 형성을 어렵게 하는 것은 사실.

 

형원: 고대 폴리스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이 이야기는 과거의 폴리스로 회기하자거나 이상화하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하고싶은 것은 앞으로의 이야기.

 

병선: 고대적 자유는 타인에 대한 폭력을 통해 가능하다. 지금도 특혜를 받은 시민들은 자유롭다. 가령 정치인처럼 노동이 필요 없는 이들.

 

형원: 안전. 9.11이후 안전에 대한 노이로제. 안전을 위협하는 타자는 절멸시켜야 한다. 그 예로 놀이터는 무조건 안전해야하기에 다치지 않는 모든 것으로 바꾸고, 학교는 절대적으로 안전해야하기 때문에 경찰이 학교에 들어가야 하고, 외국인은 위험하기 때문에 규제하고 배척해야 하고... 정치에서의 내 아이의 안전. CCTV 설치의 문제.

 

병선: 어떤 젊은 부부. ‘어떻게 CCTV를 설치를 안해 그 어린이집에?’ 군중심리와 공공감각의 차이. 불신, 나에 대한 불신과 타자에 대한 불신. 2부에서 인간은 자기 내면의 객관적인 적, 자신의 불확실함을 타자에 투영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의 가속을 어떻게 돌아가야 할까.

 

은희: 이러한 행태를 촉진하는 것. 공개되지 않는 정보, cctv사례에서 언론은 마치 어린이집 교사회와 같은 이익집단의 목소리만 반대하듯이.

 

병선: 언론도 소통, 대화가 없는.

 

형원: 이러한 체제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대안을 만들어야 하는. 공동육아처럼.

 

병선: 그렇게 벗어나서 자리 잡은 것들에 대한 압박.

 

21. 전체주의와 종북

-발제문 생략-

형원: 지금 우리 사회가 독재적이고 엉망진창이기는 한데 그것을 아렌트의 전체주의와 연결하는 것은 무엇이 의미가 있을까? 그것의 실익은? 충분한 설명이 되지도 않은 것 같다.

 

한진: 운동장에 줄서서하는 조례같은 모습. 이탈하면 안 되는 것. 국가는 그런 것을 원하나?

 

 

22. 정치와 권력

-발제문 생략-

병선: p.210 그런 점에서 정치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범죄이고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위협.

 

형원: 미국혁명을 왜 높게 평가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한진: 정치적 틀은 이어져야 한다.

 

병선: p.212. 권력을 폭력으로, 폭력을 권력으로

 

형원: 권력은 사실 영어로 그냥 power 혹은 political power로 해석. 그냥 정치력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 권력이라는 단어의 부정성. 정치를 둘러싼 상식과 용어에 대한 냉정한 성찰이 필요. 시민불복종은 법의 위반이 아니라 새로운 법을 위한 행위일 수 있다.

 

병선: 밀양에 관하여 녹색당 이 판결은 아니다;

 

형원: 정치가 사라지는 예시 중, 환경문제에 대하여 미국은 법학자와 경제학자가 평가, 법원의 최종판결, 유럽은 그러한 경제학자가 거의 없음. 미국은 진리란 전문가에게 위임, 유럽은 토론을 통하여 도출한 것이 진리. 현재 많은 사회적 이슈에 재판이 끼어드는 것으로 정치가 설 자리가 없어짐. 판결이 나면 더는 논란이 끼어들 자리가 없음.

 

병선: ‘비영어권 영어토론 대회거기서 우승한 덴마크 아이. 우리는 어릴때부터 교사와 협상을 하며 자랐다. 숙제 등에 대하여. (나 바빠서 그거 다 못할 것 같아요)

 

지숙: 우리는 어린아이가 잘 모르기 때문에 맡기지 않는데, 아이들을 전적으로 믿기 때문에 그런 협상이 가능한 것 같은.

 

형원: 덴마크 뿐 아니라 교육에 있어서 yes/no에 대한 절대적 선.

공적인 장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 예를 들어 이 자리에서 나의 의견을 표출하고 그런 방법이 내가 교육받아 온 방식의 표출. 일본의 지역 정당 후보들 교육을 위하여 엄청난 코스가 있음. 우리나라는 일단 운동권이나 진보적인 곳에 들어서면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하지, 훈련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음. 자유든 평등이든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고 잘하는 것은 유창한 것과는 다르다. 마음이 통하고, 진정한 것.

김용민씨라고 목사님 아들, 김어준씨랑 같이 활동하는. 팟캐스트에서 콘돌리자 등에 대한 수위 높은 성희롱. 이 사람은 언어에 대해 더불어 살기 위한 기본이 부족.

 

23. 전체주의와 풀뿌리

-발제문 생략-

공동체 위에 인간일수도 있다. 공동체가 제공하는 무대 위의 인간. 공동체 안에 인간이 있다는 비유가 맞는 것일까?

 

병선: 아렌트는 굉장히 감정, 가치를 탈각시키고 형식과 제도만을 보자는 것으로 보이고, 함석헌은 이것저것 다 집어넣어서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

 

형원: 지사적으로 느껴져서 관심이 안가는.

 

병선: 정치적 인간을 계발하는, 같이 획득하려고 노력하는 것, 지사적인 것.

 

형원: 감정, 논리를 구별할 것이 별로 없고, 굉장히 뭉뚱그려서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더 가깝게 갔다고 느낀다. 인간이 가지는 생의 의지라는 것이 극복하고 나아가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근사하지만 굉장히 추상적. 남의 의견을 의지로 받아들이지 말 것. 생의 철학 같은 경우는 개인적 의지를 강조, 여기서 말하는 용기는 나서서 말해!’와 같이 가벼운 것이지만 그것도 쉬운 것은 아니다. 함석헌씨의 주장이 입신양명으로 나아가자는 아니지만 개인이 어디까지 갈 수 있나 보자. 인 것 같아서 위험 할 수 있는.

 

형원: ‘살아가겠다의 저자의 시각은 지식인이 아래로 내려가겠다는 식의 시선, 근데 아렌트는 그러한 계급의식이 전혀 없음. 민중에 대한 시각, 그런 것이 전혀 없음. 깨어 있는 사람들이 내려가야한다 식의 주장이 전혀 나타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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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소감문 - 박정원

함께 읽기/기타 2015. 10. 28. 23:56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세바시 / 후루이치 노리토시『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2015.11.01 / 박정원

 

행복한 젊은이들이 사는 방식

 

일본 젊은이들의 행복도가 높은 이유를 저자는 2장 [작은 공동체 안으로 모이는 젊은이들]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힌다. 자신이 ‘이보다 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p134) 그리고 마치 한마을에 사는 주민들처럼 ‘동료’가 모인 ‘작은 세계’에서 일상을 보내는 젊은이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행복한 이유의 본질이라고 말한다.(p141) 그럴 수도 있겠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더 이상 궁금한 게 없으므로 책을 읽을 흥미를 잃었다.

 

그런데 4장 [일본을 위해 일어서는 젊은이들]에서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참가자들이 ‘즐거워’하는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라는 마음을 갖는지 하는, 동기부여의 측면이 더 중요하다(p214)는 말이 관심을 끌었다. 그들은 ‘친구’ 혹은 ‘동료’가 생겼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일단 그곳이 ‘마음 둘 곳’이 되어 버리면 최초의 목적성은 ‘냉각’된다는 우려를 비친다. 일단 조직에 합류하면 조직 자체가 선(善)이 되어버리는 문제점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6장 [절망의 나라에 사는 행복한 젊은이들]도 꽤 흥미로운 장이다. 저자는 행복의 조건으로서 ‘경제적인 문제’와 ‘승인의 문제’ 두 가지로 고찰한다. 정사원과 프리터의 급여 격차가 그리 크지 않다는 점, ‘가족 복지’(금수저/흙수저!), 나이가 들수록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승인에 있어서 연인과 친구의 존재,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손쉬운 승인 사회도 재미있는 관찰이다.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사회변화를 이루어왔으므로 일본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예견하는 것이었다. 일본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우리 젊은이들의 모습을 읽고 차이를 살피고 앞날을 예견해 보기도 한다. 지금의 ‘헬조선’은 일본보다 열악하다는 평판인 듯 싶은데 우리 젊은이들은 어찌 살아가야 하나라는 걱정을 하며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