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반구 백인 남성 여피족의 여유를 연상하게 하는 사진? 



150719자급의삶은가능한가_6공유지지켜내기되살리기다시만들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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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The Subsistence Perspective _ Beyond the Globalised Economy

6 공유지 지켜내기, 되살리기, 다시 만들기

마리아 미즈베로니카 벤홀트-톰젠 지음, 꿈지모 옮김

과천녹색당 세상을 바라보는 몇 가지 시선공부모임 _ 깃털 | 2015.7.19

 

가축 사료로부터 쓰레기까지: 공유지 파괴와 EU의 농업정책

마리아의 고향 : 쾰른 남쪽 구릉 지대 작은 마을. 공유지인 숲, , 작은 시내, 자급자족하는 32명 농부의 자유로운 공동노동으로 유지. 공동체 작업은 즐거웠다. 마을 숲의 장작, 소 돼지 먹이기, 가난한 이들의 마을 땅 이용은 무료. 오늘날 두 가구 남음. 공유지는 사유화, 혹은 거대 기업농 임대. 남은 공유지인 마을 숲은 임금 노동으로 관리.

1940년대 이후 EU 농업 정책 : 근대화, 기계화, 화학화, 자본화. 농민 감소, 농업의 산업 종속.
농업 보조금, 값싼 대출금이 거대화, 시장화 강요. 경쟁력 없는 농민 도태, 젊은이들은 공장으로.
마을 가꾸기’: 어린이공원, 포장도로, 잔디마당 딸린 집들로 꾸미기. 빚더미. (새마을운동)

사료, 비료로 쓰던 유기물, 잔디, 잔가지가 엄청난 유기물 쓰레기: 순환 사라짐 임금 싼 튀링겐의 산업 비료 회사에 폐기물 수출. 이동 비용으로 감당 못할 빚 + 생태적 손해.

EU 농업 정책: 농민을 ‘garbage population’으로 선언, 상품 아닌 생산물은 쓰레기로 전락.

 

오랜 공유지 제도 파괴, 자유로운 공동 노동은 사적 임금 노동으로, 공유지 사용권은 사적 소유로.

(유기성) 쓰레기: 저자들은 사적 소유와 개인의 이윤 추구가 부정적 공유지인 폐기물 문제를 풀 수 없음을 깨달았다.

산업사회는 유기, 산업, 독성 폐기물을 공유지’, ‘자유 접근 지역’(공짜)으로 불리는 남반구에 수출. 공기, , 열대우림, 사막은 산업사회의 쓰레기장이 됨. (()폐기장, 매립장의 정치학)

 

남반구 공유지를 지키지 않고는 북반구 공유지를 다시 만들 수 없다

리카르도 비교우위 법칙 : 산업국 소농 줄이고 노동력 싼 남반구의 먹거리 수입하는 게 타당.

산업국 공유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려면 남반구 공유지를 조사해야 한다.

글로벌 엘리트들이 관리하는 전 지구적 공유지(global commons)’, ‘지구촌(global village)’. 공유지 접근권 얻기 위해 이용하는 개념. 남반구 공동체에 대한 파괴, 파편화, 포획은 개발, 진보, 효율의 이름하에 정당화되었다. “공유지를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으로 만든다.” = “농부를 자급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세계 시장을 위해 생산하게 한다. 남반구 여성 노동력을 더 효율적으로 이용한다.

 

공유지 지키기: 파푸아뉴기니의 사례 토지 동원mobilisation 프로그램에 대한 저항과 승리.

세계은행, IMF: 채무 이행 강요한 구조조정 프로그램(SAPs). 기름야자나무 플랜테이션, 광산 자원과 열대 원목 접근권 획득 위해 공유지 접근하고자 함.

토지 개혁에 대한 저항은 생계, 언어, 문화, 그 기반인 공유지와 공동체의 권리 유지 위한 투쟁.

언제든 고향에 돌아가 땅을 이용할 수 있어 기아, 노숙, 실업 문제가 없었다. 성공 모델.

공동체가 공유지 관리하는 한 개인 소유권, TRIPs 등은 쉽게 실행될 수 없다. 민중과 지역언론은 정부의 토지 동원, 토지 해방 정책의 배후(세계은행), 땅을 빼앗기면 구걸하는 거지가 된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했다. 수천 년 동안,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 충분히 풍요로운 사람들이다.

여성들의 적극성. 모계 전통 가진 씨족들에서 여성들은 관습적 토지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토지를 등록할 필요 없이 그러면 누구나 다 땅에 계속해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땅을 스스로 관리해야 한다는 공동체들의 원칙이 세계은행, IMF, 국제 자본, 지역 정부까지 무력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토지 동원령은 철회되었다.

 

남반구와 북반구 사이의 접점은 있는가

공유지를 둘러싼 몇 개의 이론적 이슈들
자본은 식민주의적 엔클로저를 계속해야
독일 소농의 잉여화와 말살은 (1) 근대 산업농에의 통합, (2) 남반구 농산물의 수입과 연관.
남반구 민중은 자신의 자급/생계와 공유지의 연결고리를 여전히 알고 있다.
유럽의 도시 소비자와 농촌 생산자는 생계-땅 관계를 망각하고, 생계-/시장만을 떠올리게 되었다. 유럽에서 GATT/엔클로저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
파푸아뉴기니로부터 배울 때다. 공유지를 지키고 재창조하는 일은 산업사회에서 생존의 질문.

 

새로운 공유지와 새로운 엔클로저

마르크스의 생각과 달리, 자본은 지금도 공유지의 엔클로저와 폭력적 식민화를 필요로 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더 많은 지역/차원의 엔클로저를 의미 : 토지, 광물, + 종 다양성, 식물, 동물, 종자, 토착민의 지식. 생명공학, 특히 유전공학은 생명의 모든 구성물을 엔클로저/사유화.

인도 님나무 특허권 사례 : 토착 민중 공동의 지식을 약탈하려는 신식민주의적 시도.

인간 게놈 프로젝트 : 인간 게놈을 신성불가침한 인류의 공동 재산, 전 지구적 공유물로 선언(유네스코 윤리위원회)함으로써 유전자 기술과 상업적 이해관계에 자유 접근을 허용한다.

제약회사, 농업회사는 유전 자원에 대한 자유 접근권 얻기 위해 세계 유산으로 인정할 것 요구.

공동체의 공유지를 전 지구적 공유지’, ‘세계 인류 유산으로 선언 다국적 기업의 접근권 보장. 특허법에 의해 국가가 공공선의 수호자로 등장, 합법화 사유화, 상업화, 독점화의 합법화 지역 공동체의 몰수와 빈곤화. | 파푸아뉴기니 민중들은 속지 않았다.

 

북반구에서의 공유지 재발명

명확히 할 것들 : 1) 전 지구적 공유지란 없다. 공유지란 하나의 공동체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2) 공동체, 공유지, 문화와 자급 윤리의 연결성. 인간 공동체와 자연 사이의 경계가 엄격하지 않으며, 상호 침투한다. 경제는 윤리, 문화, 영성과 분리되지 않는다. 쓰레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자본주의: 책임과 돌봄의 부재. 생산자(임노동자)는 사용가치에, 소비자는 어디서 와서 그 쓰레기가 어디로 가는지에, 관심이 없다.

쓰레기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 공동체 : 생산과 소비를 다시 연결해 특정 지역의 삶의 지속성에 대한 공통의 책임감이 출현하도록 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공유지를 재창조할 수 있다.

 

쓰레기로서의 공유지

공유지를 재발명하려는 미국, 유럽의 사회적 실험들은 (1) 복지제도가 부닥친 벽, (2) 새로운 생산과 삶의 방식을 실험하려는 사람들 때문/덕이다.

탈산업화된 도시의 폐허 속에 공동체의 정원 창조하기, 지역 경제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 세우기, LETS와 같은 시도. 쓰레기를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상품화(민영 비료시설 건립)로는 쓰레기를 해결할 수 없다. NIMBY. 유기물 쓰레기를 부정적 공유물로 선언. ‘우리가 처리한다.’ 지역 생태계의 순환으로 다시 돌아가야.

북반구의 채무의 덫. 의문 제기. 가난한 자들의 생계/자급 기반으로 공유지 보존되어야.

공유지, 여성 그리고 자연

이른바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것

Garet Hardin “공유지의 비극”(1968) : 목장(공유지)이 모두에게 개방되면 목동은 개인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목장을 파멸시킨다. 비극을 피하기 위해 공유지를 엔클로저, 사유화하고, 중앙 집중 권력 장치로 관리해야 한다. 이 단순한 논리가 신뢰받으며 문제 해결의 길로 여겨졌다!

 

여성 길들이기와 공유지 엔클로저

인류의 공동 유산이라는 신비화. 지구를 지키는 올바른 방법처럼 보인다.

공동체와 자연의 직접적 교환 작용은 비생산적이고 가치 없는 일로 간주된다.

공유지가 전 지구적 관심사가 되는 방식은 여성 노동의 가내화domesticationfmf 떠올리게 한다. 이상화됨과 동시에 비경제화. 삶의 재창조 활동에 대한 긍정적 느낌과 존중이 그 구체적 물질적 현현과 분리. 존중은 감성적으로, 경제는 사랑 없는 일로 되었다. 여성의 자급 일은 일이 아니며,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이 착취가 아닌, ‘순수한 사랑이라는 이상화.

남성-프롤레타리아, 여성-주부. 프롤레타리아이면서 더 낮은 계급. 여성은 출산의 운명이 아무런 (경제적) 가치를 갖지 않게 되었기에 임금을 덜 받는 게 당연하게 되었다.

공유지도 마찬가지로 비가시화, 탈경제화되면서 매우 높게 이상화. 누구나 보호할 자격, 조작할 자격을 가졌다고 여긴다. 결국 거기 삶을 의존한 사람들로부터 땅을 빼앗는다. 공유지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만인의 권리로 쉽사리 조작되었다.

공유지는 순수한 자연/야생이 아니며, ‘재생산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무시된다.

 

자연 길들이기와 엔클로저

여성의 자급 노동과 공유지의 이상화와 비가시화는 같은 뿌리를 가진다. 자연과 경제를 분리하는 근대적 세계관. 인간과 자연의 교환에 기반한 생산 방식은 자연 과정 그 자체로 간주.

공유지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권, 그리고 여성 노동에 대가 없이 자유로이 접근할 권리.

자연은 생산적이기 위해 착취되어야 한다. 즉 단순히 자원이다.

 

비극에 저항하는 역사

멕시코의 깜뻬시니스따스-데스깜뻬시니스따스논쟁. 후자는 사회주의자의 정치적 프로젝트에 따라, 노동자의 기계적 연대보다 열등한 토착 농부 공동체의 유기적 연대를 파괴하길 원했다. 이들은 결국 멕시코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 즉 국가와 국영 집단/협동 기업(가짜 공동체)에 의한 지역 공동체의 파괴(그리고 농부의 추방과 도시 프롤레타리아화)를 정당화했다.

논쟁은 상호부조의 공동체와, 그 위에 군림하는 공산주의 체제가 어떻게 다른지 알려 주었다. 결국 사회주의의 협동 제도와 자본주의의 사적 제도 간의 차이는 사소하거나 없다.

 

문화적 무지

하딘의 문화적 무지. 매우 대중적인 이데올로기를 확실하게 글로 드러낸 셈. 가난한 자들의 물, 공기, 공간을 파괴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반대편의 과소비와 경제의 거대화를 정당화했다. 자신의 몸, 문화, 경제 형태, 사회구조, 자원, , 공기, 공간을 관리할 개인 주권에 대한 공격.

오로지 다른 사람의 상황에서 성찰함으로써만 자기 자신에 관해 알 수 있다.” 이것이 인종차별주의를 극복하는 필수조건이다.

 

경제 합리성 논리: 경제는 삶을 가져다주지만 어머니와 공유지는 삶을 파괴한다

부조리한 근대의 정당화. 자연의 다산성을 파괴적인 것으로 범주화.

여성의 자급 노동은 이상화됨으로써 비가시화되었는데, 하딘은 경제적으로 부적합할 뿐 아니라 파괴적인 것이라고 공공연히 선언.(급진화) 어머니 지구를 존중하던 세계관의 180도 전환.

하딘에 의하면 생명을 낳고 돌보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순전히 자연. 사람들은 통제 없으면 식물처럼 증식한다는 맬서스주의. 사회적 해결이나 여성의 자각적 결정 무시.

공유지, 공동체는 의식적인 인간의 재생산과 유지로부터 제거되며, 이를 사회적 책임 하에 돌볼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에게 단 하나의 이성은 환경을 파괴하는 경제적 이성이므로.

사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것은 불합리하다. 공유지는 엔클로저 되어야 하며, 사유 재산을 소유한 인간들만이 경제적으로 적절히 행위하는 인간이고 나머지는 잉여인구이다.

 

공유지 다시 만들기: 자급 관점

공동체 없는 공유지는 없고, 공동체는 경제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공유지 재창조는 곧 공유지 경제의 재발명과 연결된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공적 공간을 지켜내고 다시 만드는 것. 부정적 공유지인 쓰레기에 대한 책임에서 출발.
세계화의 물결에 저항하는 지역화와 지방화. 생태적 지역 생산.
탈중앙집중화.
기계적인 대중 연대에 저항하는 것으로서의 상호부조. 모두가 환경을 약탈해 평등하게 나눠갖자는 사회 정의. 기술 진보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믿음. 이에 대한 우리의 비판. 기술 진보란 생태계 파괴와 여성 종속의 결과를 낳는 산업과 프롤레타리아화를 위한 변명을 제공할 뿐.
위로부터의 정책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정책. 우리는 전 지구적 해결책이나 전 지구적 거버넌스와 같은 새로운 거대 정부의 전 지구적 정치를 믿지 않는다. ‘여성의 경우 글로벌 정치학은, 모든 여성은 평등하며 따라서 가부장제하에 있는 북반구 국가의 도시 백인 여성의 기준에 따라 평등하게 취급되고 지배될 수 있다는 담론을 만다는 데 봉사한다.’
공동체를 실현하는 다중적 방식, 그리고 공동체의 다양성. (마치, 생태계 다양성)

 

 

어서들 오셔요. 오셨으면 무슨 말이라도 해주셔요.^^

날적이 2015. 7. 6. 21:0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제가 참 이런 것들에 밝지 못해서 

팀블로그가 많이 썰렁합니다.

제가 뭐 딱히 취향을 가지고 설계한 것이 아니니

혹 뭔가 하고 싶으신 바가 있으시면 

이것저것 마음대로 손대주셔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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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3장 발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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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급과 농업

 

아그네스와 리즈베스 : 여성의 손에 달린 토지 1989년 독일 쉔펠트에서의 대화

시몬농장

아그네스가 농장을 물려받은 이유

-여 문제

여성 농민에서 가정주부로

농부의 촌 냄새

관계들: 세대, 이웃, 마을

-문화-삶의 기쁨-페미니즘

근대적 농업정책

미래에 대한 관점

돈 벌이가 되는 일자리는 무슨 의미인가?

자급 지식과 감정들 : 염장, 발효 등 삶의 지식들, 돌봄, 농사 등 자연과의 관계의 지식들. 땅과 인간과의 상호 연결성. 이 모든 것들은 사람들에게 전수되어야 한다.

자급 소농 경제 : 자연과 연결, 생명에 밀착된 삶. 고난도 고생도 행복도 치유도 자연에 의해서 비롯됨.

도시 소비자 생활 : 인간과 연결, 관계, 서열, 비교, 권력관계에 밀착. 성공, 실패, 고통, 극복, 모두 상대적이고 사회적인 평가에 의해서 규정.

 

여성과 생태학

도살, 가축의 삶 : 눈을 보기 어렵다는 것. 태어날 때부터 알아온 소. 정말 아름다운 동물. 하지만 죽기 위해서 길러졌다. 이것은 인간의 의도일 뿐.

생명의 본질은 무엇일까. 생명은 언젠가 죽는다. 늙어죽든, 잡아먹히든 마찬가지. 본질은 계속 이어가는 것 아닐까. 가축으로 태어나 결과적으로 잡아먹히더라도 과정으로서의 의미는 충분할 듯.

내 현생을 영위하기 위해 너의 생명이 필요하다. 그래서 채식을 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남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채식의 선택은 일종의 영적인 차원의 일이다.

생명에 대한 존중이 중요한 까닭 : 나 자신을 속속들이 존중하기 위해서. 나도 생명. 영혼은 이 세상에 생명의 형태로 나온다. 영혼으로서의 자아, 생명으로서의 자아. 생명을 받아 나온 까닭, 찰나적 생명의 무한한 네트워크, 모래 한 알의 장엄함. 이 앞에 겸손해지지 않고서 어떻게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을까.

 

, 자급의 기초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의도 : , 자본, 기계, 투자를 진정한 근원으로.

자본주의. 가부장제. 모두 시스템. 시스템은 뭐지? 왜 생기지? 개인들의 욕망의 공감대인가? 불안, 권력욕, 우월욕을 보장하기 위한? ‘암컷에게 선택받고 싶은 수컷의 본능의 사회적 형태?

생명은 여성으로부터, 음식은 땅으로부터.

농경문화와 소농 경제는 자급관점의 결정적 구성요소.

도시환경에서의 임금노동, 도시의 노동과 실험에 초점을 두면, 자급 능력이라는 아이디어를 회복하기가 힘들어진다.

좌파들조차 농업·소농 경제를 대안으로 택하지 못한다 : 소농 경제로 돌아가는 것은 그 지루한 필요의 세계로 퇴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땅·지구는 매우 특별한 질료이다. 산업자원이 아니라 매우 다른 방식으로 취급되어야. 근거는? 우리 하나하나가 소속되어 있다, 어머니 지구, 생명체 네트워크, 신성. 모두 영적, 개인적 차원에서 확인되는 것. 가치·세계관 차원의 공감이 필요.

경작이 토양에 적응해야 하는가, 토양이 경작에 적응해야 하는가.

 

생산력의 발전 대 농경

기아는 기술화의 한 결과이다. 식량농업기구가 수차례 기술을 통한 녹색혁명은 토지의 자본가 집중을 낳는다.

기술과 부정의한 분배는 동전의 양면이다.

기술, 즉 생산력의 수준은 그 자체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현상이다.

좌파의 논리, 자급 경제는 산업 사회 이전 단계 즉 필요에 의한 생산으로 회귀하는 것. 자기 자신의 필요를 위한 수공업적 생산에 불과한 것.

사회적 필요노동. 하향식 권력의 작동에 의해 조직되어서는 안 됨. 땅에 대한 접근을 기초로 하는 상향식 상호관계를 통해 조직되어야

소규모의 혼합경작이 세계를 먹여 살릴 수 없다는 것은 고의적인 거짓말이다.

 

우리는 땅에 의지해 먹고 살아야만 하는가

감자를 캐는 공포스러운 그림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20세기 말, 현재의 자급을 그려야 한다.

도시는 우리의 조건이자 현실이다. 도시에서의 자급을 구상해야 한다.

자급시장 철폐

 

독일에서의 소농 경제 파괴

농장 몰락 메카니즘. 자급지향에서 이윤지향으로의 전환에서 가장 사라지기 쉬운 것은 소농이 아니라 중간 규모의 농장 즉 빚을 내어 투자에 나섰던 이들이다.

 

소농 경제

모든 경작자를 농부로 취급하면 대토지소유주와 소농 사이의 구분이 은폐된다. 진짜 농부(소농)를 이윤창출을 위한 사업가의 무리에 끼우게 된다.

진정한 소농 경제의 특징 : 축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농장과 여러 세대에 걸친 생계 해결과 사람들의 재생산을 위해 운영된다는 것.

소농 경제는 땅, , , 식물, 동물들 안에서의 경제적 활동이 유한한 기반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자체로 특수한 삶의 방식, 간소한 생활문화.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 모든 사람들은 나처럼 자신의 땅을 가질 권리가 있다.

특히 젊은이들은 하나를 희생하여 다른 하나를 얻는 것을 금지하는 사회적 통제가 갖는 긍정적 기능을 깨닫지 못하여 마을에서의 삶이 갖는 편협성(함께 살기 live and let live)에 대항해 반항을 하기도 했다.

함께 살기. 도덕적 경제. 경쟁이 아닌 상호성. 모든 인간이 그들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생산의 필요조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농부, 농장주, 농경기업가. ‘농부라는 말에 들러붙은 경멸의 뉘앙스 : 아기의 똥을 치우는 어머니에 대한 경멸, 토양을 다루는 농부에 대한 경멸, 생명의 기본적 필요를 보살피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

 

[베스트팔리아 보르겐트라이히의 소농경제] : 1960~70년대 도덕 경제에서 최대화 경제로 이동한 마을의 사례. 소농 전통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오래전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개발에 대한 저항: 치아파스 농부들의 경우

[치아파스 소농들과 개발의 실패]

플랜테이션 개발이 실패한 사례.

77년 사파티스타 봉기, 82년 맥시코 부채 위기, 프로젝트 자금 철수, 개발의 길 위에 있는 실패를 감지한 첫번째 사람들. 자급용 옥수수, 호박, 콩 대신 수출용 화훼와 고급 채소를 공급하기 위해 빚을 내도록 유도됨.

그들은 자급 지향성 때문에 자신들에게 쏟아지던 퇴보적이다, 바보 같다, 이성에 둔감하다 등의 경멸 때문에 상처받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오랜 농경문화가 그들을 진보라는 종교에 의해 세뇌당하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농 연구의 기여

자급 지향성 등 소농 경제의 잔존요소들의 가치를 재조명했다.

1920년대 러시아의 차야노프. 독립 소농 경제 이론 발전시킴. 생태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적응력을 지닌 소농 경제를 지지함. 농부를 임노동자화시키는 집단농장 콜호즈에 반대함.

소농 경제는 이윤극대화가 아니라 필요에 맞게 조정되었다. 그것은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위험은 피하며 운영되었다. 목표 이윤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하여 농장이 문을 닫지도 않았고, 더 높은 기대 때문에 자본이 다른 영역으로 이전되지도 않았다. 어려운 시기에는 사람들이 허리끈을 졸라매고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적게 소비했다. 시절이 좋아지면 더 많은 여가를 즐겼고, 잉여 수입은 투자되는 것이 아니라 축제를 벌이기 위해 사용되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현재 존재하는 것을 유지시키는 일이 우선순위였다.

근대 초기 이후로 농부에게 부여되던 사회적 지위가 주부로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유사하다.

농부와 여성은 인간 존재의 직접적이고 일상적인 필요에 종사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필요의 영역을 극복해야만 자유의 문이 열린다고 믿는 세계에서 가치 있는 존재로 간주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우파나 좌파 모두에서 발견되며, 페미니스트나 여성 혐오주의자 모두에게서 발견된다.

우리가 현 세계를 위해 소농 경제에서 배울 수 있는 것

외극 경제 : 소농 경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양 극단의 경제 시스템 바깥에 존재

소농 친화는 낭만적이다? “최대화 경제로 다 해결이게 더 낭만적이다.

어쨌든 실업은 증가하고 사회복지의 축소는 계속될 것이고 따라서 비공식 영역이 지속적으로 확장될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문화 사회적 모델에 의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룸펜프롤레타리아트 모델인가? 아니면 사회적 경제 모델인가?

 

여성농부와 자급 관점

미래에 대한 공주병적인 전망 : 가능한 한 적게 일하고 투쟁 없는 평등을 즐기며 일상적인 필요에 의한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는 일종의 파라다이스.

농부의 삶은 여성에게 어떤 권리도 부여하지 않는 길고 긴 고통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자급생활에서 즐거움과 고생은 동전의 양면이다. 만족과 자기 실현의 원천, 삶을 자신을 손아귀에.

유기농업 : 낭비된 기회?

소농 경제, 지역화 그리고 자급 관점

[농업의 산업화에 찬성하지 않는 농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