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소감문

함께 읽기/기타 2015. 11. 25. 12:54 Posted by 서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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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소감문_아즈마 히로키_선정우

과천녹색당 세상을 바라보는 몇 가지 시선공부모임 _ 깃털 | 2015.11.25

 

 

너는 네가 네가 아님을 깨쳐야 네가 되기 시작할 것이며, 네가 네가 되기 위해선 타자 및 타자에 대한 욕망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들을 동료, 도반, 혹은 벗이라 하자.

 

동물화한 인간 : 전후 미국에서 등장한 소비자 대중, 오타쿠, 그리고 우리.

  • 인간의 동물화 : 사실은 아무 설명이 필요 없이, 직관적으로 옳다.

  • 주어진 환경을 부정하거나 환경에 대해 투쟁하지 않는 인간.

    욕망 없는 욕구 충족. 배고프면 먹고, 영화를 보면 울고/웃고, 답답하면 여행을 떠나고. 이 모든 행위가 상품과 서비스의 소비로 충족가능하다. 상품과 서비스의 선택 가능성은 한없이 광대한, 그래서 나는 자유롭다고 말하게 할, 데이터베이스로 주어진다. 여기에는 뭐가 없다? 타자/타인이 없다. 타자가 없는 것이 편하다. 그래서 타자가 필요 없는 인간이 곧 오타쿠다.

  • 중심성의 왜곡된, 상업적으로 주입된 강조. 타자를 지우면 나는 상품들을 대면한다.

  • 타자가 필요 없다. - 간주체적 욕망이 없다. - 행위(아렌트)가 없다. - 정치가 없다. - 정치경제 지배 엘리트의 먹이가 된다.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동물화된 인간들의 욕구-충족 회로 위에 미국식 자본주의와 엘리트 정치가 번성한다.

  • 타자/간주체성을 잃으면, 토목공사는 거미줄 치기, 콘서트는 매미 울음과 다르지 않다.

  • 웰메이드, 우리를 안심하게 한다. 데이터베이스들이 절묘하게/웰 집합되었고, 내가 기성품 같은 울음과 웃음을 잘 터뜨리도록 해준다. 자기 것이 없는 아이히만의 언어와 같다.

  • 저항 음악? 데이터베이스에서 골라낸 저항의 클리셰들. 저항 음악에 감동? 기성품 같은 감정의 데이터베이스에서 골라낸 감정의 클리셰들. 저항적 음악이 아닌, 진짜 저항 음악이 있겠지.

  • 동물화된 인간은, 결핍-만족의 반복이라는 돼지우리에 갇힌 인간의 모습을 의미한다. 무수한 선택지들(데이터베이스)과 신성불가침한 선택권이 있다. 이 얼마나 자유롭고 존귀한 존재인지.

  • 그러니까 우리는, 즉물적인 약물중독자다. 취미도 취향도 아니고, 약물중독이다. 주입된 욕망이며, 욕망의 흉내내기다. 이 욕망이 가짜라는 건,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멈출 수 있다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타자와의 게임, 밀고 당기기, 간주체적 행위가 없기에 불편하면 멈추고, 내가 멈추면 실제로 멈춰지는 것이다. 성가신 인간관계가 없는 행복하고 자유로운 세상이다.

  • 거세된/불임의 욕망이라는 의미에서 가짜 욕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진짜와 가짜의 차이는, 손쉬운 성기적 욕구 충족과, 인간의 성적 관계를 획득하려는 노력 사이의 차이와 같다.

우리의 언어를 통한 나의 회복

  • 내가 내가 아닌 것들로 조립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물론 여러 부품/데이터 중에 내가 선택했을 순 있으나그 어떤 것도 내가 만든 건 없고그런 나는 아무 이야기도 지어내지 못한다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만들어지는 내가 아니면 가짜다타자에 대한 욕망우정에 대한 갈구가 없으면나는 가짜다연결 짓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척하는 해리적 인간들그러나 연결/이야기를 대체한 동물적인 욕구의 충족으로 채울 수 없는 고독은결국 터진다인생이 망한다는 말이다. 

  • 진짜 나의 언어를 찾아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언어를 만들자그것으로 우리 삶과 우리 미래를 직조하자.

사회를 구성하며, 나를 초월하는 신화를 이야기로 직조했던 인간들. 장구한 역사, 드높은 가치, 지고한 담론, 거대한 판타지로 이어졌다. 망망한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욕망은 이들 과거의 욕망들과는 다른 것일까? 초월에 대한 갈망에 어떤 보편성은 없을까? 이때 자유란 무엇일까?

심층(심연)에서 거대한 이야기가 사라진 까닭은 무엇일까.


126.

무엇보다도 계몽이나 이성 같은 커다란 이야기가 처음으로 조락하기 시작한 것이 1차대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역으로 그 조락이 완전히 표면화한 것은 냉전이 붕괴하고 공산주의라는 최후의 커다란 이야기의 망령조차 없어진 1989년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914~1989 : 커다란 이야기의 조락, 근대포스트모던시대의 긴 이행기. 냉소주의와 스노비즘. 

이것이 일본에서는

129

1945~1970: 이상(理想)의 시대, 커다란 이야기가 그대로 기능

1970~1995: 허구의 시대, 커다란 이야기가 가짜로서 기능, 이야기 소비

1995~현재 : 데이터베이스 소비, 심층 자체의 소멸, 표층의 기반은 심층이 아닌 데이터베이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심층(심연)에서 거대한 이야기가 사라진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저자의 말에다 뭘 좀 보태보자면, 

저자는 근대적 이성주의(인간의 이성은 전능하다)1차대전을 통해 조락을 시작했다고 본다. 인류가 이성의 야만성을 목도한 것이다.

1800년대 초반 이성에 대한 믿음은 베토벤의 운명교향곡(1808)에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중세의 권위가 시민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혁명의 열기로 표출되던 시대, 꽝꽝꽝 꽝~! 인간이 개척한 운명이 문을 두드린다. 열어야만 한다. 고통받는 민중들의 고뇌와 삶을 목도했으니 이제 박해와 압제의 시대는 가고 사랑과 해방의 시대가 올 것이다.(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차이코프스키, 엘가 위풍당당행진곡)

하지만 문을 연 결과는 1차 대전의 야만이다.(엘가 첼로협주곡E단조) 쐐기를 박듯 2차 대전이 일어나고 최첨단 기술의 집적이 역사상 최대의 학살을 일으킨다. 신념이 해체되고 인류는 해체되어 개인(소비자)으로 해체된다. 조화(에 대한 믿음)는 사라지고 카오스적인 불협화음이 진실이다.(쇤베르크 등) 마지막 신념으로 소련에 구현된 공산주의가 남지만 실체는 그 허구인 스탈린주의일 뿐이다.

1989년 스탈린주의(옴진리교)가 무너짐과 함께 거대한 이야기가 사라졌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거대한 이야기=유일신에 대한 믿음, 조화와 통합, 이성적인 세계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이 데이터베이스(개인의 자아와 분리된 파편의 축적물)이다. 이제 서사는 사라지고 파편 조합의 소비만이 남았다.......

는 것인데, 그렇다면 거대한 이야기는 어디에서 사라진 것인가? 심층이란 누구의 심층인가? 저자는 아마도 대중(또는 시대정신)을 말하는 듯한데, 정말 시대정신에서 거대서사가 사라졌을까? 저자의 증거는 일본의 미국의 동물적 소비자이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어쩌면 사회 지배층에게서만 사라진 것은 아닐까?

여기서 조셉 캠벨의 말이 생각났다.

 

(예시 : 메소포타미아 지역 아가데의 사르곤왕(기원전 2350년 경)과 바빌론의 함무라비왕(기원전 1700년 경)의 신화)

(농경사회의 우주론적 신화로부터 왕들의 신화, 도시국가의 건국신화가 파생되었다. 이것은) “전설 자체가 우주론적 지평으로부터 개인적인 관련으로 하강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열등한 명상을 낳는다. 즉 신의 이미지 속에서 에고가 소멸(신화적 동일시)하는 대신 정확히 그 반대가 된다. 신의 자세 속에서 에고의 고양(신화적인 과대화)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을 조작하는 기술에 숙달된 자들이 육체를 갖춘 신의 역할을 해내고 그러면서 용케도 양날 도끼로부터 목을 구하게 된 이후로, 이것은 통치자들의 만성적인 병이 되었다.....그러한 속임수의 결과는 왕권을 사제단과 별들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국가를 종교적(성직자의) 제도에서 정치적(왕족의) 제도로 바꾸며, 왕들의 주된 관심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세상의 정복이 될 수 있는 시대를 연 것이었다.”-서양신화 93, 조셉 캠벨 저, 정영목 역.


두 이야기를 연결해보자. 근대적 이성은 도시국가를 건설한 왕들의 의지(에고)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에고가 대중에게 전염되어 집단적 과대망상으로 드러난 것이 근대의 이성주의 아닐까. 왕들이 세상을 정복하려 했던 것처럼 인간이 이성으로써 세계를 건설하려 했던 것 아닐까. 이런 맥락의 세계 건설 스토리가 위에서 말하는 거대한 이야기의 정체 아닐까. 그렇게 보면, 4500년에 걸친 실험이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사건을 끝으로 쫑났다는 것이다. 그 긴 시간동안 인류는 우주론적 지평에 대한 것을 모두 잊어버렸다. 그러니, 세계는 그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일 뿐이라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선언의 근거는? 오타쿠와 동물화한 소비자로 대별되는 현대의 상업주의.

 

사족.

대중이 잃어버리고 있던 우주론적 지평을 찾아주려 한 대표적인 인물이 석가모니와 예수였던 것 같다. 하지만 과거에나 지금에나, 대중과 그 지배층들 사이에서는 그 가르침에 대한 오해가 지배적이었나 보다.

“...부처는 이윽고 이렛 동안 네번째 나무 아래서 해탈의 기쁨을 만끽했다. 이 때 그는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남들에게 전할 수 있을지 가늠해 보다가 당분간은 홀로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 브라마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에게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부처는 그의 말에 승복, 자신이 깨친 도리를 전파하기로 하고는, 자신이 속인들과 함께 살던 도시로 돌아가 정도(正道)의 법이라는 귀한 은혜를 두루 전파했다.” - 세계의 영웅신화 36~37쪽, 조셉 캠벨 저, 이윤기 역.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함께 읽기 2015. 11. 1. 18:35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그동안 우리가 청년을 보는 시각이 얼마나 보수적인 틀에 갖혀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요미우리 신문등에서 요즘 젊은이들의 내향적임을 비판하는 사설들은 우리나라 언론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향적이고, 국가에 관심이 없는 소위 말하는 우리 세대의 경향은 개선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있었다. 그래 우리도 으쌰으쌰 일어나야지. 도대체 무얼 위해, 어떻게,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며 우리가 그러한 생각을 갖게하는 것도 일종의 정치였음을 알았다. 아니 실은 더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으나 그 생각이 내 앞에 문서로 다가왔다. 그것은 엄청난 차이이다. 아마도 이 책이 일본에서 엄청난 열풍을 일으킨 것은 나와 같이 느낀 청년들의 리액션일 것이다.

나느 오래전부터 가족에 대한 신화는 깨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회가 더는 '가족은 화목하다'라는 것을 더 이상 가족의 공식으로 여기지 않기를 바랐다. 내 주변의 많은 가족들은 그렇게 이상적으로 화목하지 않기 떄문이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에 충성해야한다' '국가를 사랑해야한다' 따위의 국가에 대하여 국민이 가져야 하는 태도, '현대의 젊은이는 유학도 가고, 나라 밖으로도 나가고, 투표는 해야하며, 국가가 국민을 필요로 해야할 때 누구보다 빠르고 충성적으로 응해야 한다' 따위의 국가의 신화나 젊은이의 공식도 이제는 깨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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