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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_후루이치 노리토시_이연숙

과천녹색당 세상을 바라보는 몇 가지 시선공부모임 _ 깃털 | 2015.11.1

 

 

이 책에 의하면, 젊은이의 필요 = 빈곤 해결 + 승인 욕구 해소

   - 빈곤 해결 : 우리 사회에서 프리타를 통해 친구와 놀고 콘서트 가고 여행을 하는 등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생활이 가능한가?

   - 승인 욕구 : 이 책에서 말하는 일본 젊은이의 승인 욕구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 자체이고 생계는 따로 해결 가능.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어떠 일이든 인정을 받으면 바로 금전적 보상으로 전환해야 하는 체계 아닌가? 위나 아래나 모두, 결국 돈으로 보상해달라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왜 그 일을 왜 하냐며. 별풍선.

 

(일본 젊은이들은) “굳이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모두 해결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를 통해 해결. 젊은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저자가 바라본 일본처럼 다양한 문제들인가, 혹은 매우 기초적이거나 생존적인 문제인 건 아닌가? 해결하지 않고도 일본 젊은이들처럼 각자 해법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문제들인가?

 

우리 사회도 행복한 계급 사회로 갈 수 있을까? 의사 결정에 분주한 일등 시민과, 태평하게 하루하루를 소일하는 이등 시민으로 구성된. 생각할 점은, 이른 바 <물적 토대> 문제, 행복한 이등 시민을 만드는 문제. 행복한 이등 시민 = 새로운 식민지.

 

왜 청년일까? 청년을 위로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심지어 청년의 행복을 위해서도 아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유를 잃고 사육되고 착취되며 그날그날을 자기 삶을 소모하는, 그런 사회로 가는 징후가 지금 청년의 삶과 삶의 환경에서 읽히기 때문이며, 청년이 아니라, 내가, 혹은 우리가, 단호히 그런 사회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생각대로 말하자면, “무언가를 하고싶다.” 혹은 이대로는 안 되는데.”라고 말하며, 자신의 지루한 일상을 바꿔줄 강력한 비일상을 희망하는, ‘불끈하는 젊은이들, 분명히 존재하지만 무기력하다. 무기력하기에 월드컵이 끝나면, 봉사 활동을 마치면, 결국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 존재하지만 스스로 활성화되지 못하는 에너지다. 그래서 스스로 정치적으로 무력하고, 그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여기에 간단명료한 출구를 제공하는 기획가planner 내지는 촉진가facilitator가 필요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의지를 가진 촉매 그룹의 필요성을 함의하는 것일 수 있다. 공감을 가장한 푸념어린 동어반복 - “힘들어!” “얼마나 힘들겠어.” - 은 물론이고, 잠시 불끈하고 다시 흩어지게 되는, 월드컵이나 일시적 봉사 활동 같은, 장기 전망에 대해서는 될 대로 되라는 재밌는 활동으로는 큰 절망과 작은 행복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결심만 굳히게 할 뿐이다. 저자는 뜻 있는 집단이 마음 둘 곳으로 여겨지면 당초의 목적 따윈 잊게 된다고 말함으로써, 이런저런 활동들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식의 낙관론에 쐐기를 박는다. (마음 둘 곳이 된다는 게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 활동에 단독적인 의미부여를 하는 경우는 대체로 문제가 있다. 상대화, 맥락화하지 않는 고립된 활동에 머무를 때 말이다.) 에너지의 이와 같은 조직화가 곧 정치요, 이를 담는 그릇이 정치세력 아닐까.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소감문 - 이한진

함께 읽기/기타 2015. 10. 31. 22:1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읽고 (이한진)

일본은 막연하게 우리와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해서 청년들 이야기도 비슷할 것이라 예상은 하고 봤지만 생각보다 더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몇가지 새롭게 생각하게 된 것 중 하나는 일본도 50, 60대 어른들을 하나의 공감대로 엮을 수 있는 것이 경제 부흥시대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 그것은 우리나라 경제가 부흥했던 시기에 일본도 그러했다는 것. 뭐랄까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은 한마디로 박정희 대통령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처럼 당연하게 인식되어지고 있는데, 세계적으로 전쟁 이후에 전반적으로 발전하고 있던 상황이 아니었나 싶다. 이렇게 빨리 되지는 않았겠지만, 그 속도만큼 놓친 것들은 고스란히 남아 있을테니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 가져야하는 태도에서 지금의 젊은 세대까지 찬양하고 따르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책을 통해서 청년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 부분도 많지만 그 부흥을 만들어갔던 어른세대들의 상황, 마음, 생각들을 많이 상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세대론의 관점으로만 보면 놓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점. 예를 들어 청년들의 사망 원인 중에 자살률이 1위라는 것을 표면에 내걸게 되는데 실제로 노인들이 몇 배는 더 자살률이 높다는 사실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보면 청년세대를 살피면서도 전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고 이 시대에 청년들을 통한 어떠한 메시지를 뽑아낼 때 혹은 뭔가 이 시대를 탐구해볼 때 감정적인 부분만큼 객관적인 부분도 놓치지 않고 다각도로 바라보면서 좀 더 근원적인 물음들을 해나가면서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하게 확인하고 공감한 점은 50대 이상 어른 층은 의견들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전체적으로 공감할만한 요소들이 상대적으로 있지만 요즘 청년들은 크게 '젊은이'라는 말로 통칭하기 힘든 만큼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포괄적으로 공감하고 나눌만한 시대적 국면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청년세대에 많은 문제가 있지만 핵심적인 어떤 것이 보인다기보단 산발적인 느낌들이 많다.

가장 생각에 남는 말은 마음 둘 곳이 필요하다는 것’. 어디 젊은이들뿐이겠냐만, 그냥 당연한 본능이겠지만 어딘가 마음이 짠하다. 크건 작건 건강한 모습으로 마음 둘 만한 곳이 늘어났으면 좋겠고(그 틈에 집단적인 애국심이나 내셔널리즘 같은거 말고), 스터디 모임하면서 배움의 효과인지 여러모로 공론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자주 들었다. 한편으론 여전히 여러가지 위기감이 많지만, 한편으로 개인적으로 막연하게만 느겼던 위기감에서 조금은 덜어진 느낌이고 오히려 지금의 젊은이들이 더 잘할 수 있고 이전 세대들보다 보다 좀 더 발전할 수 있는 점들이 있어 보인다고나 할까. 갈 길은 멀어보이고 달라진건 없지만 좀 더 희망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세상을 바라보는 몇 가지 시선 6차 모임

함께 읽기 2015. 10. 29. 00:1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권정우, 하승우 지음, 아렌트의 정치

-세바시 6차 모임, 서형원, 홍지숙, 신은희, 박병선, 이한진, 김지원, 장예정-

 

발췌된 부분은 어려운데 설명된 부분은 허무하다는 느낌이 들만큼 쉽게 설명.

정치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적립된 것과 같은 느낌.

 

추천사&서문

-발제문 생략-

첫째와 둘째의 가장 기본적인이라는 군더더기 있는듯한 표현.

 

11. 수용소와 무슬림

-발제문 생략

병선: 전체주의를 시스템이 아닌 운동으로 정의했다는 점에서 놀랐다. 헌법을 군중심리로 대체하였다라고 생각했다. 국민과 비국민으로 나누는 그러한 모습으로. . 한일월드컵 당시, 축구에 반응하지 않고 지나는 사람에게 ‘Are you Japanese?"라고 묻는 그러한 모습. 2장의 대중과 안전에서 더 이야기하는 걸로.

 

형원: 인간에 대한 완전한 지배는 가능할까? 하는 대목에서. 첫 번째 책에서 노동을 상품으로 만들 수 있느냐?와 같은 맥락의 질문인 것 같다. 대한민국 전체가 인간에 대한 완전한 지배는 가능할까? 에 대한 거대한 실험실이 된 것 같다.

 

2. 대중과 안전

대중에게 먹고 사는 것은 진짜 중요할까?

대중은 누구일까?- 한무리, 덩어리라는 뜻으로 해석. 대중에 섞이지 못할 때의 불안감.

p.73.

아렌트는 계급사회/ 국민국가의 붕괴로 대중이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대중은 왜 통제되어야 하나?

: 리바이어던의 개념으로 인위적 국가를 설명. 리바이어던의 목적은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비전 제시는 아니었다.

: 논의의 장이되는 탁자가 필요하다. 공적인 것은 공동의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세계성을 갖는다고 말하고 세계성은 인간이 탁자를 갖는 것을 말한다.

p.83. “타인을 염두해 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 너무나도 소중하다.”

<은희-그러나 자신의 감정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어떻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지? 하는 의문, 지나친 감정에 대한 경계정도로 이해하였다.>

노동과 행위에 대하여.

작업의 중요성-인간의 직접적인 수작업이 공유나 공동체를 만드는 행위로까지 보고 있는 것. (후에 다시 이 대목 논의)

왜 정치가 중요한가? (다소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껴짐)

p.93. 아렌트는 공적 영역이란 타인의 현존을 기반으로 자신의 차이성을 말과 행위로 드러내는 공간.

 

병선: 노동, 작업, 행위에 대한 정의와 탁자의 이야기, 용서와 약속에 대한 설명의 탁월함에 놀람. (형원 too) 노동은 생존의 영역이다,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형원-생물로서 필요한) 작업은 나만의 행위인 것이며 행위는 타자가 존재하는 공동의 일이다. (지숙-미술작업에서의 작업의 의미와 전혀 달라서 놀랐다.) 작업의 특징을 다른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 오직 나만의 행위인 것이다. 아렌트에게 있어서 정치의 작업이란 건축 등에서의 작업과는 전혀 다른 정치에서의 작업이 있는 것이다. p.91. 혼란을 질서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 인간이며 이것이 작업의 욕구이다.

 

지숙: 행위라는 말이 잘 이해가 안됬는데 나의 발제부분에서 타인의 존재가 행위에 들어있기 때문에 말과 행위는 정치적인 것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소통

 

형원: 레비나스 등의 주장은 타자는 절대적인 타자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해할 수도 없고, 지배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극복 불가능한 절대성을 지니는 대상이 타인이다. 이로 인해 파생되는 안전에 대한 불안감. (타자는 절대적으로 믿을 수 없기에) 용서와 약속. 레비나스는 타자란 성경의 과부나 고아와 같이 이해와 같은 것이 필요 없게 절대적으로 도와야 하는 그런 대상.

 

한진: ‘만남’(더 뒤쪽 단원에서) 노동, 행위와 같은 차가운 개념보다 만남이라는 단어가 더 잘 와 닿았다. 피부로 와 닿는 직접적인 만남이 아니라 어딘가 존재하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에의 주입. 직접 만나본다면,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인권이라는 것이 와 닿게 되듯이. (병선-사랑이 아니라 존중이다.)

 

형원: common sense-한 공동체가 공유하는 어떠한 공감. 말과 행동으로 공유되는 어떠한 것. 그러나 감정은 아니다. 다원성이 갖는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대화의 장에 나갔을 때의 것,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자유로운 인간.

 

병선: 가정에 대한 언짢은 표현. (형원-오늘 날의 가정이랑 다른 가정일 것)

 

은희: 세계성. (p.80-81) 세계를 갖는 것. 함께 이야기하는 탁자가 필요하다. 작업이란 세계를 만드는 활동이다. 작업이란 혼자만의 행위로 한 사이클. p.91를 토대로 작업을 노동과 달리 의미있는 행동이라고 표현했다고 생각. (형원-작업이 세계를 만드는 활동이다? 무슨 의미일까?)

 

형원: 노동에 대한 민감한 논쟁.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노동이란 신성한 것이라는 절대적 믿음.

 

지숙: 내가 말을 했는데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 그건 무엇이지

 

3. 공론장과 자유

-발제문 생략-

한진, 형원: 성경의 말과 같은 말인것 같다. 안전이 보장된 그곳을 떠나서 나아가라.

 

병선: 가정을 엄격한 불평등의 세계이며 노동과 생존의 세계라고 표현(고대 그리스의 사회)

경제학이 굉장히 중요한 학문으로 여겨지는 것이 슬픈 현실이다. 폴리스에서 하던 좋고, 탁월한 것은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를 경제학이 대체.

 

형원: 가정은 지금의 가정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 당시 가정은 생산단위의 하나라고 생각해야 한다. 지금의 가정은 그마저도 못하는 듯.

 

병선: 그것이 공론장 형성을 어렵게 하는 것은 사실.

 

형원: 고대 폴리스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이 이야기는 과거의 폴리스로 회기하자거나 이상화하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하고싶은 것은 앞으로의 이야기.

 

병선: 고대적 자유는 타인에 대한 폭력을 통해 가능하다. 지금도 특혜를 받은 시민들은 자유롭다. 가령 정치인처럼 노동이 필요 없는 이들.

 

형원: 안전. 9.11이후 안전에 대한 노이로제. 안전을 위협하는 타자는 절멸시켜야 한다. 그 예로 놀이터는 무조건 안전해야하기에 다치지 않는 모든 것으로 바꾸고, 학교는 절대적으로 안전해야하기 때문에 경찰이 학교에 들어가야 하고, 외국인은 위험하기 때문에 규제하고 배척해야 하고... 정치에서의 내 아이의 안전. CCTV 설치의 문제.

 

병선: 어떤 젊은 부부. ‘어떻게 CCTV를 설치를 안해 그 어린이집에?’ 군중심리와 공공감각의 차이. 불신, 나에 대한 불신과 타자에 대한 불신. 2부에서 인간은 자기 내면의 객관적인 적, 자신의 불확실함을 타자에 투영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의 가속을 어떻게 돌아가야 할까.

 

은희: 이러한 행태를 촉진하는 것. 공개되지 않는 정보, cctv사례에서 언론은 마치 어린이집 교사회와 같은 이익집단의 목소리만 반대하듯이.

 

병선: 언론도 소통, 대화가 없는.

 

형원: 이러한 체제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대안을 만들어야 하는. 공동육아처럼.

 

병선: 그렇게 벗어나서 자리 잡은 것들에 대한 압박.

 

21. 전체주의와 종북

-발제문 생략-

형원: 지금 우리 사회가 독재적이고 엉망진창이기는 한데 그것을 아렌트의 전체주의와 연결하는 것은 무엇이 의미가 있을까? 그것의 실익은? 충분한 설명이 되지도 않은 것 같다.

 

한진: 운동장에 줄서서하는 조례같은 모습. 이탈하면 안 되는 것. 국가는 그런 것을 원하나?

 

 

22. 정치와 권력

-발제문 생략-

병선: p.210 그런 점에서 정치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범죄이고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위협.

 

형원: 미국혁명을 왜 높게 평가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한진: 정치적 틀은 이어져야 한다.

 

병선: p.212. 권력을 폭력으로, 폭력을 권력으로

 

형원: 권력은 사실 영어로 그냥 power 혹은 political power로 해석. 그냥 정치력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 권력이라는 단어의 부정성. 정치를 둘러싼 상식과 용어에 대한 냉정한 성찰이 필요. 시민불복종은 법의 위반이 아니라 새로운 법을 위한 행위일 수 있다.

 

병선: 밀양에 관하여 녹색당 이 판결은 아니다;

 

형원: 정치가 사라지는 예시 중, 환경문제에 대하여 미국은 법학자와 경제학자가 평가, 법원의 최종판결, 유럽은 그러한 경제학자가 거의 없음. 미국은 진리란 전문가에게 위임, 유럽은 토론을 통하여 도출한 것이 진리. 현재 많은 사회적 이슈에 재판이 끼어드는 것으로 정치가 설 자리가 없어짐. 판결이 나면 더는 논란이 끼어들 자리가 없음.

 

병선: ‘비영어권 영어토론 대회거기서 우승한 덴마크 아이. 우리는 어릴때부터 교사와 협상을 하며 자랐다. 숙제 등에 대하여. (나 바빠서 그거 다 못할 것 같아요)

 

지숙: 우리는 어린아이가 잘 모르기 때문에 맡기지 않는데, 아이들을 전적으로 믿기 때문에 그런 협상이 가능한 것 같은.

 

형원: 덴마크 뿐 아니라 교육에 있어서 yes/no에 대한 절대적 선.

공적인 장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 예를 들어 이 자리에서 나의 의견을 표출하고 그런 방법이 내가 교육받아 온 방식의 표출. 일본의 지역 정당 후보들 교육을 위하여 엄청난 코스가 있음. 우리나라는 일단 운동권이나 진보적인 곳에 들어서면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하지, 훈련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음. 자유든 평등이든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고 잘하는 것은 유창한 것과는 다르다. 마음이 통하고, 진정한 것.

김용민씨라고 목사님 아들, 김어준씨랑 같이 활동하는. 팟캐스트에서 콘돌리자 등에 대한 수위 높은 성희롱. 이 사람은 언어에 대해 더불어 살기 위한 기본이 부족.

 

23. 전체주의와 풀뿌리

-발제문 생략-

공동체 위에 인간일수도 있다. 공동체가 제공하는 무대 위의 인간. 공동체 안에 인간이 있다는 비유가 맞는 것일까?

 

병선: 아렌트는 굉장히 감정, 가치를 탈각시키고 형식과 제도만을 보자는 것으로 보이고, 함석헌은 이것저것 다 집어넣어서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

 

형원: 지사적으로 느껴져서 관심이 안가는.

 

병선: 정치적 인간을 계발하는, 같이 획득하려고 노력하는 것, 지사적인 것.

 

형원: 감정, 논리를 구별할 것이 별로 없고, 굉장히 뭉뚱그려서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더 가깝게 갔다고 느낀다. 인간이 가지는 생의 의지라는 것이 극복하고 나아가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근사하지만 굉장히 추상적. 남의 의견을 의지로 받아들이지 말 것. 생의 철학 같은 경우는 개인적 의지를 강조, 여기서 말하는 용기는 나서서 말해!’와 같이 가벼운 것이지만 그것도 쉬운 것은 아니다. 함석헌씨의 주장이 입신양명으로 나아가자는 아니지만 개인이 어디까지 갈 수 있나 보자. 인 것 같아서 위험 할 수 있는.

 

형원: ‘살아가겠다의 저자의 시각은 지식인이 아래로 내려가겠다는 식의 시선, 근데 아렌트는 그러한 계급의식이 전혀 없음. 민중에 대한 시각, 그런 것이 전혀 없음. 깨어 있는 사람들이 내려가야한다 식의 주장이 전혀 나타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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