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소감문 - 박정원

함께 읽기/기타 2015. 10. 28. 23:56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세바시 / 후루이치 노리토시『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2015.11.01 / 박정원

 

행복한 젊은이들이 사는 방식

 

일본 젊은이들의 행복도가 높은 이유를 저자는 2장 [작은 공동체 안으로 모이는 젊은이들]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힌다. 자신이 ‘이보다 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p134) 그리고 마치 한마을에 사는 주민들처럼 ‘동료’가 모인 ‘작은 세계’에서 일상을 보내는 젊은이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행복한 이유의 본질이라고 말한다.(p141) 그럴 수도 있겠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더 이상 궁금한 게 없으므로 책을 읽을 흥미를 잃었다.

 

그런데 4장 [일본을 위해 일어서는 젊은이들]에서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참가자들이 ‘즐거워’하는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라는 마음을 갖는지 하는, 동기부여의 측면이 더 중요하다(p214)는 말이 관심을 끌었다. 그들은 ‘친구’ 혹은 ‘동료’가 생겼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일단 그곳이 ‘마음 둘 곳’이 되어 버리면 최초의 목적성은 ‘냉각’된다는 우려를 비친다. 일단 조직에 합류하면 조직 자체가 선(善)이 되어버리는 문제점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6장 [절망의 나라에 사는 행복한 젊은이들]도 꽤 흥미로운 장이다. 저자는 행복의 조건으로서 ‘경제적인 문제’와 ‘승인의 문제’ 두 가지로 고찰한다. 정사원과 프리터의 급여 격차가 그리 크지 않다는 점, ‘가족 복지’(금수저/흙수저!), 나이가 들수록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승인에 있어서 연인과 친구의 존재,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손쉬운 승인 사회도 재미있는 관찰이다.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사회변화를 이루어왔으므로 일본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예견하는 것이었다. 일본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우리 젊은이들의 모습을 읽고 차이를 살피고 앞날을 예견해 보기도 한다. 지금의 ‘헬조선’은 일본보다 열악하다는 평판인 듯 싶은데 우리 젊은이들은 어찌 살아가야 하나라는 걱정을 하며 마무리한다.

아렌트의 정치 1장

함께 읽기 2015. 10. 11. 15:4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권정우, 하승우 아렌트의 정치

-1, 수용소와 무슬림-

 

아우슈비츠가 악명 높은 이유는 희생된 이들의 숫자 때문이 아니라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했던 비인간성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수용소에 살았을 때도,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용소: 전체주의 권력이 총체적 지배를 위하여 만든 실험소

 

1. 인간에 대한 완전한 지배는 가능한가?

전체주의는 여타 체제들과는 다른 차이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운동으로의 생명력이다. 근대의 국민국가 체제라는 것은 헌법, 영토, 국민이라는 배타적이고 제한적인 권리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전체주의는 우선 헌법을 무시해버렸다. 법이라는 체제대신 숙청, 테러, 비밀경찰들과 같은 비공식적인 방법들을 이용하였다. 정부 조직이나 관료제도 등도 무시하였다. 영토는 세계정복의 운동으로 밀고 나갔으며 국민은 지속적인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주입으로 확보하였다. 비밀경찰 등은 서로가 누구나 적이 될 수 있다는 공포를 심어 놓는다. 이에 아렌트는 전체주의 체제를 실체도 없고, 정해진 모양도 없는 체제라고 불렀다. 체제가 없다는 것은 곧 신속함, 속도전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뜻이다.

 

2. 수용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나?

<수용소는 가장 인간다운 조건인 인간의 다원성, 개성, 자발성을 철저히 통제하는 장소이다.>

Q.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삶과 죽음과 연관된 존재인데, 삶과 죽음은 기억으로 연결 되어 있다. 생명이 끝이 난다고 해서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다. 타인이 추모라는 의례를 통하여 망자를 기억할 때 그는 아직 살아있는 존재인 것이다. 전체주의 수용소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조건, 근거, 형식을 완전히 지배하고자 한다. 수용소에 갇혀 이름을 빼앗기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이름이 기억되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실험체가 된 수인들은 인간 존엄의 마지막인 자살의 자유조차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수용소는 이렇게 인간을 동물로 만들어 버린다. 이 극악한 수용소는 그저 지나가는 운동으로 소멸됬을지도 모르는 전체주의를 극단으로 몰아붙이게 되었다.

 

3. 왜 인간은 제 발로 가스실에 들어갔나?

수용소에서 인간은 완전히 벌거벗은 평등, 아무런 욕구도 충족되지 않는 완전한 고립 속에 각각이 실험체로 존재한다. (p.47)

수용소에 갇힌 이들에게 더 이상 명예, 삶의 고귀함 등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간수들도 그들의 그러한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렇게 갇힌 이들 스스로가 쓸모 없게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이러한 인간 스스로가 느끼는 쓸모없음과 허무는 전체주의 지배의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이다.

 

무슬림: 복종하는 그들의 모습이 마치 엎드려 기도하는 무슬림같다고하여 붙여진 수용소의 은어

            그것이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가만히 엎드려 복종하는 것)


4. 누가 아이히만인가?

아이히만은 히틀러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한다거나 전체주의에 심취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 너 친위대 안할래?”라고 묻는 질문에 그러지 뭐라고 답하고 수용소에 들어가게 된 것이 전부였다.

사람들은 아이히만이 악마이기를 바라였으나 어쩌면 그는 그저 타인과 말하는 능력, 타인의 입장에서 공감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명령만을 이행하는 무능한 인간일 뿐이었다.

 

아우슈비츠가 박물관이 되기에는 이르다고 느껴지는 지금, 우리는 과연 타인과 대화하고 있을까?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고 있을까? 


엄청 길어요. 뒷부분은 이해가 잘 안되어 마구 받아적은 것 같고요. 오늘 공부 마치고 좀 가닥이 잡히면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정치이론과 한국사회

아렌트의 정치

권정우 하승우 지음

 

2부 전체주의와 풀뿌리

정치와 권력

/ 지숲

 

민주적인 지도자 보다 시민. 시민의 정치력.

주입식 암기식 교육이 아니라, 대화로 구성된 교육.

기득권을 가진 사람에게 유리한 규칙과 구조들.

 

1. 소크라테스는 왜 독배를 받았나?

플라톤 - ‘이데아라는 유일한 진리를 추구.

소크라테스 - 다양한 의견을 추구.

 

소크라테스를 빗대어...

산파 - 출산을 도울 뿐 아이를 대신 낳아줄 수 없는 산파처럼,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스스로 각성하도록 돕는 교육방식. 계속되는 질문으로 상대의 무지를 드러냄.

쇠파리(등에) - 사람들이 깨어있도록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이 자기의 소명이라 믿음.

전기가오리 - 감전, 마비, 멈춰서 생각하게 만듬.

사람들이 스스로 현명하지 않다고 인정하게 만들고 가르치지 않음을 통해 스스로 가르침을 얻게 함.

 

폴리스를 시민의 삶,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지배할 수 없는 정치공동체로 보고 중요하게 여김.

 

의견은 절대적이지 않다. 모두에게 정당하지도 않다.

세계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으나 세계의 드러남은 그 사람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모두가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서로의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정치행위는 대화로 시작되고 대화 자체의 진리성보다는 이런 대화로 맺어진 우정이 정치를 활성화시킨다.

공동체는 차이로 구성되고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원리는 우정의 평등이다. 우정의 평등은 서로 똑같거나 동등해지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는 우정의 성취다. 논쟁을 즐기는 장소에서의 동등한 관계가 시민들의 차이를 끝없이 증가시킨다. , 차이로 이뤄진 공통의 세계, 우정의 정치가 지속되는 공간을 위해 소크라테스는 목숨을 걸고 싸웠다.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

- 모방과 찬양을 > 토론과 합리적인 비판으로 대체

- 기성질서에 대한 거부, 반란,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 열림, 기성체제를 위협

 

사상가 가리타니 고진이 설명한 소크라테스 - 이성은 세계나 사람에게 내재하지 않는다. ‘대화를 통한 것만이 이성적이다. 대화를 거부하는 자는 아무리 심원한 진리를 파악하고 있다 해도 비이성적이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내 생각을 드러내고 다른 이의 생각을 듣는 것을 넘어, 공감하고, 타자를 타자로 인식하고,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질성을 느끼고 본다.

 

파울루 프레이리 억압받는 사람들의 교육학’<<페다고지>>에서

우파 - 길들여진 현재로 미래를 재생산하려 함

좌파 - 미래를 불가피한 숙명으로 받아들임

우파와 좌파 모두를 비판하면서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주체로 서는 혁명을 주장.

진보적 교육자의 한 가지 과제는,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진지하고 정확한 정치적인 분석을 통해서 희망을 위한 기회를 밝혀내는 것

억압당하는 사람들 내면에서 재생산되는 지배구조를 타파하려함.

해방교육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민중이 자기 사고의 주인으로 느끼도록 하는 데 있다.”

민중지식의 신비화, 민중지식의 절대 찬양은 민중지식의 거부만큼이나 문제가 된다. ... 민중지식을 거부하는 것이 엘리트주의라면, 민중지식을 절대 찬양하는 것은 근본주의.” - 민중과 지식인의 지식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문제

억압받는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교육하고 의식화시키는 방법으로는 결코 인간해방을 이룰 수 없다고 믿었다. 해방에 필요한 것은 선전이나 의식화가 아니라 바로 대화이다.

민중을 끌어들인다’ - 혁명가가 아니라 억압자의 어휘. 혁명가의 역할은 민중을 획득하는 게 아니라 민중을 해방시키고 자신들도 함께 해방되는 데 있다.

교육자와 교육받는 사람, 엘리트와 대중, 혁명가와 민중은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켜야 한다. 공동연구자. 친구.

정형화된 지식. 집단주의 문화. 획일성을 강요하는 사회. / 소크라테스 식 대화와 교육

교육은 자기 속에 내재하는 의견을 드러내고 밝히며 합의하는 과정.

에두카치오 - 이끌어냄

 

김삼봉 <<도덕교육의 파시즘>> - 한국에서 시민이 출현하지 못하는 원인은 노예교육

교사의 능동성과 학생의 자발성이 양립하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문제.

서양에서 교육은, 노예를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인의 자기 실현.

한국교육은, 자기를 스스로 형성하는 자유로운 시민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타율적 지배에 양순하게 순종하는 노예를 기르는 것.”

 

주인이 된다는 건 참 나를 찾는 멀고 험한 과정에 오른다는 의미.

대화와 산파술이 없는 사회는 전체주의에 빠지기 쉽다. 상관의 명령과 권위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인간.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잃음.

타자도 나와 같다고 전제하면, 질문은 사라지고 나와 다름은 배제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타자는 사라지고 그와 더불어 대화를 나눌 존재를 잃어버린 나도 괴물로 변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동일하다고 전제하는 근대적인 의미의 법 앞의 평등보다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동등하게 대우받을 권리를 뜻하는 희랍어 이소노미아가 더 중요하다.

하나 속의 둘’ - 내 속에 내가 많은 건 장애가 아니라 다원성의 반영이다. 한 개인도 온전하게 하나인 사유를 할 수 없는데, 인류 전체의 무한한 다원성을 부정하는 것은 정치를 가로막는 장애물.

아렌트 <<정신의 삶>> - “‘사유는 소수의 특권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능력. 사유하지 않는 무능력은 지력이 부족한 대다수 사람들의 결점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는 가능성이다. 과학자나 학자, 정신 활동을 하는 다른 전문가들도 예외는 아니다.“

 

2. 정치란 무엇인가?

19681126일 발표, <국민교육헌장> (서울대 박종홍 교수 초안, 박정희가 발표>

(1994년에 폐기)

차이와 다양성보다는 특정한 이념, 획일성, 집단성을 가르쳤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아렌트에게 인간은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규정을 거부, 인간이 행위를 통해 역사를 만드는 것이지, 역사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은 낡은 세계에서 새로운 정치가 가능한 조건을 우리 스스로 마련하는 과정, 우리가 만든 세계를 미래 세대에게 강요하는 과정이 아니다.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

나의 발전이 나라의 융성과 무관하진 않겠으나 인간이 만드는 세계는 나라의 경계를 넘어서 존재한다. 아렌트가 강조한 정치공동체는 배타적인 국민국가보다 세계시민공동체.

추상적인 개념이 구체적인 개인의 삶을 지배하면 새로운 정치가 시작되지 못한다. 정치는 다원성을 통해서만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2010년 법무부, <법질서 탐구생활: 나의 법질서는 몇 점?> 만화

한국사회에서 모범시민은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시민이 아니라, 침 안 뱉고 새치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한국과 같은 곳에서의 정치는 모범시민보다 시민불복종과 훨씬 더 잘 어울린다.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듯이, 기존의 규범과 질서를 더 이상 묵묵히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을 때 정치적인 존재가 출현한다. (과제는 이런 정치의 등장이 일시적인 흥분과 열광 속에 수그러들지 않도록 할 방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은 정치적 동물. 인간이 홀로 살 수 없는 존재이자 말을 할 수 있는 동물이기 때문. 인간은 말하고 행동하면서 각기 다르지만 서로에게 필요한 관계망을 형성.

 

김선욱 <<한나 아렌트 정치판단이론>> “아렌트, 인간의 복수성(다원성)과 같은 인간학적 사실은 고정적 실체로서 인간에게 주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를 통해 형성해가는 것이다. 인간의 정체성은 타인과의 정치적 관계를 맺는 가운데 형성, 이렇게 형성된 정체성이 정치적 행위를 통해 드러나게 되는 순환구조를 갖는다.”

정치는 나를 나답게, 너를 너답게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활동이고 공통의 세계 위에 구현되는 나와 너, 우리의 좋은 삶이다.

 

아렌트, 정치적인 존재는 특정한 속성이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행위를 하고자 하는 사람. 말과 행위를 함으로써 인간은 타자에게 호소하고 동의를 구하며 공동체의 방향을 정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은 특정한 사회를 실현하면 중단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계속되어야 할 과정.

 

김선욱, “참여는 곧 자기 형성의 실존적 행위인간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당위나 의무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모습대로 살기 위해서. 참여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지만, 그건 시민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동물로서의 생존에 가깝다.

 

플라톤, 정치를 진리의 실현과정으로 봄.

그런 플라톤을 비판하며 아렌트, 정치의 세계를 진리의 세계, 철학의 세계와 구분했다. 왜냐면 정치는 행위의 영역이어서. 정치의 성공과 실패는 진리의 문제일 수 없고, 행위자와 관찰자는 정치적인 의견 형성을 통해 서로 대화해야 한다. 참여자는 현안에 몰입할 수밖에 없고 그만큼 시야가 좁아진다. 그리고 참여자의 성공과 실패는 그의 진리가 아니라, 그에게 명예를 주려는 구경꾼의 시선과 그들의 의견에 달려있다.

 

한국사회는

진리나 기준, 정답, 모범답안이 없으면 불안, 활동을 하지 않으려 한다.

각자가 자기 생각을 드러내고 자기 의견을 고집한다면 공동체는 어떻게 가능한가?

아렌트, 타자와 차이 없이 공동체가 어떻게 가능한가?

두 명 이상이 만나면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공동체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사는 세계일 뿐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세계가 공유물이라는 것. 지금 우리의 것, 또한 미래세대의 것.

 

정치경제학자 사이토 준이치, <<민주적 공공성>>

자신과 다른 관점을 가진 타자가 존재함을 반드시 고려.

보편적인 타당성을 단념하는 것(명확히 보는 것), 사람-사이의 근원적인 복수성을 폐기하지 않기 위한 조건, ‘세계를 타자와 공유하기위한 조건

아렌트에 대해, 사적 영역의 문제를 무시하거나 배제하려는 경향, 사적 영역으로 침투하는 생명정치의 영향력을 주목하지 못했다고 비판.

 

아렌트 <<정치의 약속>> 평등과 자유를 대립시키는 자유주의는 시민의 자유를 사적인 영역에서 참게 하고 정치의 범위를 축소한다. 하지만 자유롭기 위해 나는 평등해야 하고, 평등한 존재로서 자각하기 위해 나는 자유로워야 한다. 정치세계에서 자유를 누리려면 우리는 평등한 관계를 구성해야 한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해 지금 당장 가지고 있는 부나 학식이 다를지라도 공적인 존재로서 우리는 평등을 요구하고 나와 너, 우리의 목소리가 공적인 영역에 반영되도록 요구해야 한다.

아렌트, <<혁명론>> “이소노미는 평등을 보장했지만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나거나 창조되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본질적으로 평등하지 않기에 법으로 인간을 평등하게 만들 인위적인 제도, 즉 폴리스가 필요했다평등은 인간이 노력을 통해 달성해야 할 목표, 인위적인 세계의 특성.

 

한국처럼 위계질서가 지배하고 신분과 재산의 경계를 넘어선 만남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정치는 힘을 얻기 어렵다. 한국사회에서 정치가 활성화되지 못하는 건 시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세계 자체가 의도적으로 파괴되었고 민주화 이후에도 그 세계가 작아지고 분리된 상태로 유지되었기 때문.

 

한국전쟁과 군사독재가 파괴시킨 세계, 야만적인 강제력으로 변질된 권력을 복원하는 것은 한국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다.

 

정치에서도 공통감각이 중요하다. 각기 다름에도 우리가 뭉쳐 사는 것은 어떤 공통감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대체 어떤 공통감각을 공유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공통감각은 참여를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데, 그런 참여 과정을 거부하는 사회에서는 뒤틀릴 수밖에 없다. 국가와 자본, 그들을 대리하는 전문가들이 공통감각을 지배하려 든다. 애국심. 개발주의. 아름다움과 성공만을 강조하고 비장미나 실패를 은폐하는 문화에서도 공통감각은 왜곡된다. 한국사회의 비민주성이 가장 부각되는 영역이 바로 문화.

함께 애도하고 고통과 기쁨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공통감각은 회복될 수 있고, 그래야 정치가 가능하다.

 

아렌트, 프랑스혁명에 대해서는 부정적. 미국혁명을 높이 평가. “새로운 정치공간의 경계를 정하고 그 내부의 규칙들을 정혁명은 낡은 질서를 파괴하는 동시에 새로운 질서의 틀을 짜야한다. 그래야 세계가 지속될 수 있다. 그런 지속성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권력이다. 권력은 부패한 정치나 폭력과 다르다.

 

3. 왜 정치에서 권력이 중요한가?

정치가 지속되려면 자유로운 시민 뿐 아니라, 시민들이 만든 세계의 지속이 중요하다.

정치는 현재의 사회 운영이나 현안을 해결하는 것 뿐 아니라,

아렌트, 근본적으로 인간이 생활하는 세계의 지속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고립이나 고독이 아니라 세계를 통해 실현된다. 인간이 모든 것을 자급하지 않는 이상 함께 살아야 하고, 함께 살기 위해서는 서로의 거리를 조절하고 관계를 맺고 끊는 방식에 관한 소통과 합의가 필요하다. 이런 과정을 보장하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권력은 사람들이 행동을 위해 모일 때에만 구성된다. 결속, 약속, 연합, 계약은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 일정한 권력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해 함께 행동할 때 생기고, 그 목적을 이루고 뿔뿔이 헤어지면 소멸한다. 이것이 더 안정화되면 정치공동체가 구성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약속하고 계약하는 능력과 약속의 준수가 중요하다.

다양한 행위자들이 함께 움직이기에 어느 순간에 우리는 그 무대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다른 주인공들의 행위를 보는 관객이 되기도 한다. 사람은 들고 빠질 수 있지만 그 장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권력의 역할이다.

한국에서 정치인들이 보여준 공약 파기, 정치 술수는 약속과 계약의 중요성을 왜곡하고, 세계의 지속이 아니라 지금 쥐고 있는 권력의 지속만을 최우선 과제로 만든다. 그러면서 모이고 하나도리 뿐 아니라 흩어지고 헤어지는 과정의 중요성은 사라지고, ... 정치행위를 통해 다양한 시민들이 등장하고 영예와 불멸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드러난 소수의 전문가들 / 직업정치인들만이 공적인 행복을 독점한다. 영향력 커짐, 이를 정당화하는 영웅신화.

말과 행동이 이 세계를 움직이는 방식인 이유는, 타자와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자의 존재를 위협하거나 부정하려는 폭력을 사용하는 순간, 세계에는 균열이 생긴다.

폭력과 권력은 완전히 다른 것.

관객민주주의.

 

아렌트, <<혁명론>> 세계가 지속되려면 거리가 필요하다.

공통감각은 개별 감각의 소멸을 뜻하지 않는다. 같이 느낄 수 있지만 우리는 다르게 생각한다.

동정은 사람들의 교류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사이공간, 즉 거리감을 없애려 한다는 점에서 사랑과 다르지 않다”“동정은 거리감을, 즉 정치적인 사안들이 발생하는 사람 사이의 인공적인 장소를, 인간사의 전부라 할 영역을 없애기 때문에, 정치적인 면에서 부적절하고 중요하지 않다.”

빈민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과 빈민을 자유롭게 하는 것.

프랑스혁명과 미국혁명의 차이.

미국의 상원제도는 정제되지 않은 대중의 의견을 세련되게 만드는 중간과정. 참여자가 아닌 관찰자?(이해 안됨). 헌법정신을 만들었다.

 

시민들의 정치적인 능력이 살아나고 권력이 구성되어야...

 

한국정치.

혁명에 견줄만한 사건이 여럿 있었지만, 그 사건들이 실제로 사회를 크게 바꾸지 못한 이유는 - 시민역량 부족. 혁명을 준비하는 방법이나 혁명을 사유함이 우리 사회의 근본 구조를 건드리지 못했다. 시민을 대변한다던 지도부가 자기들의 짐권이나 자기 노선의 정당성만을 생각하고, 국가의 성격을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 한번에 사회를 바꿀 생각만 했지, 아래로부터 권력을 구성할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

 

대중사회. “사람들을 모으고 그 관계를 맺어주고 갈라놓는 힘을 잃게 함. 이 힘은 공적인 세계를 언제든 다시 구성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 힘을 상실하면 시민은 고립된 개인이나 뭉쳐진 오합지졸이 되어버린다. 정치의 가능성은 축소되거나 사라짐.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수의 문제가 아니다. 직접 간접 선거방식이나 국회의 구성방법이 아니다. “공통의 세계에 대한 관심세계를 바꿀 만큼 충분한 사람들의 결속이다.

 

아래에서부터 단단히 공화국의 기초를 다지지 못한다면, 그런 기초가 자유롭고 공적인 공간으로 구성되지 못한다면, 공화국은 유지될 수 없다.

 

지금 세대가 만든 약속과 합의는 새로 태어난 이들에게 낯선 것이고 아직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세대는 기존의 합의를 새로이 바꾸어야 한다.

아르케(희랍어) - 새로운 시작,

프린키피움(라틴어) - 시작과 원리.

 

평의회. “자유의 공간파리꼬뮨

스스로 구성한 위원회.

누군가에게 선택되지 않고 스스로를 구성하는 엘리트를 풀뿌리 차원에 배치하는 최선의 방법이자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

정치능력과 행정능력을 구분하지 않은 것은 평의회의 현실적인 한계.

한국의 인민위원회 누군가의 선동에 따라 이끌리는 대리 기구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과 공동체의 삶을 다스리려는 자치기구

 

4. 한국정치에서도 가능성이 있나?

정치적이 된다는 것, 폴리스에 산다는 것은 힘과 폭력이 아니라 말과 설득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민심을 내세우는 사람 - 민심은 다양한 시민들이 드러내는 다양한 의견과 의지.

모두를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정치인 - 모두를 위하는 건, 다양한 인간들을 특정한 유형의 인간으로 똑같이 만들 때에만 가능한 일.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사회는 권력이 아니라 폭력에 기반한 정치였다.

사회적 약자, 빈민 장애인 노동자 농민 여성 청()년 등 잔인한 일상의 폭력을 경험.

거짓된 정부정책에 복종을 거부하는 시민불복종’- 실정법을 어기더라도 헌법정신을 실현하려는 시민의 권리로 인정되어야 한다.

시민불복종은 새로운 행위로 사람들의 상식을 일깨우려는 것. 시민불복종의 행위에 대한 정치적 판단은 법원이 할 수 없다.

아렌트, 시민불복종은 법을 정립하는 정치행위, 공동체의 기반을 세우는 정치행위이다.

권력은 시민의 말과 행위를 보장할 의무를 갖는다.

 

꿈틀거림. 꿈을 틔우는 과정 이런 과정은 사유 뿐 아니라 타자와의 부대낌을 통해 얻어질수도 있다. 사유와 행동.

선언.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그가 나라고 선언.